[스크랩] 늙은 창녀라서 쪼까 거시기허요?
늙은 창녀라서 쪼까 거시기허요?
무대가 어두워지자
늙은 창녀가 꿈결같이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손님을 부른다.
"손님. 들어가도 될게라우? 예, 그럼 실례하겄구만이라우."
조명이 들어오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늙은 창녀가
다소곳한 몸놀림으로 고무신을 벗자,
발 디딜틈 없이 꽉 찬 객석에 긴장감이 돌았다.
여자 나이 마흔 하나에 늙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류계에서는,
더구나 사창가에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니 늙었다고 할밖에.
그러나 창녀의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눈빛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병의 그것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섬광이 일었다.
"왜 하필이면 나같이 나이 묵은 여자를 찾는다요?"
"꾸벅꾸벅 졸다가 한소끔 꾼 그런 꿈 같은디 그거이 이십년이랑께요."
첫 눈에, 손님은 20여 년 동안 허구한 날 받던 그런 손님이 아니다.
뭔가 모를, 이런데 발 디딜 것 같지 않은 품새다.
알 듯 모를 이끌림으로 여자는 손님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난 얘기를 끌어낸다.
한물 간 몸뚱이나마 탐하기 바쁜 여느 손님들과 분명히 다르다.
한풀이하듯 이바구 보따리가 맥없이 풀어진다.
꽃다운 나이에 송정리역에서 만난 '푼짱네다바이(납치사기꾼)'에게 처녀를 뺏기고
목포 사창가 속칭 '히빠리' 골목에 눌러앉게 된 사연이 마구 쏟아진다.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한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 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땀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둥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늙은 창녀의 넋두리는 끝이 없다.
그깟 술 몇 잔에 취하지는 않았을 터.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자와 살림 차린 이야기,
그리고 애 밴 이야기, 떠난 남자, 죽은 애를 낳고 실성한 이야기,
그리고 그 빈 자궁을 손님들이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는, 다소 섬뜩하면서도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저 밑바닥 여자의 처절한 절규.
아! 나는 여자가 옷 보따리를 끌어안고 애면글면,
"아가야!"를 읊조릴 때 울음을 삼키느라 숨이 막혔다.
연기가 아니었다.
나 역시, 히빠리 골목의 늙은 창녀가 내 무릎을 간질이며
첩첩히 쏟아내는 말을 받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불편한 객석,
그 어느 곳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남 들을까 싶어 꿀꺽, 침 삼키는 소리는 눈물을 훔치는 소리요, 안 우는 척 하는 소리다.
원작자 송기원 선생이 그랬듯,
밑바닥 인생이라고만 생각한 늙은 창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월감'이었다.
배우 양희경이 극중에서, 아니 늙은 창녀가 부르는 노래
"꿈에, 참 많이도 고향을 봤지라우.
근디 꿈만 꾸면 꼭 고향은 봄이어라우.
나가 고향 떠나던 그때맹키로 말이어라우.
어지러운 거! 내 몸뚱아리
까득하게 하얀 망초꽃 흐드러지네"
"꽃값 오천 원으로 손님이 나를 사면,
내 고향 들샘머리 복사꽃으로 나는 손님을 사요.
손님도 나도 잃어버린 거기…,
그렇지만 차마 죽어서라도 돌아갈 거기…,
오막살이 지붕 위에 저녁별 돋아나면
우리 함께 복사꽃으로 피어날 거기…."
"스무 해 동안 아무 탈 없던 몸 파는 일이
피고름 엉기듯 피고름 엉기듯 몸 파는 일이,
낮은 숨결 같은 휘파람 같은 당신 때문에
어이없이 터져버리는 오늘밤 일이야
평생의 한 풀리듯 끝없이 유채꽃밭 속…."
"생각 같어서는 나가 가진 것을 다 드레서라도 뭐이냐,
손님 허한 디를 메꽈주고 잡소만, 그것도 맘뿐이제라우.
가진 거이라곤 썩은 몸뚱어리뿐임서 지 꼴은 모르고,
손님이 그렇게 허한 구석을 보잉께 언감생심으로 그런 맘도 안드요?"
양희경씨는 소탈하게도,
연극이 끝나고 간신히 분장만 지운 모습으로
관객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객석에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양희경 :
"원작자 송기원 선생이 이 작품을 두고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셨지요.
나이 오십 넘어 조금 이해가 되네요. 이 이야기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지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자신들 삶 속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이를테면 부부 간에도 장맛 같은 우정으로 곰삭혀져야 하듯,
아름다운 꽃이 꼭 아름다운 곳에서만 피지 않는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얘기지요.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양희경의 목소리를 빌려 토해내는
고향 잃은 늙은 창녀의 피맺힌 통곡이다.
대학로에서 관객몰이를 하고있는 늙은 창녀의 노래는
작가 송기원(60)씨가 마흔한 살 때,
'뒷골목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잡지에 연재를 하며 전국을 떠돈적이 있었다.
불혹을 넘기면서도 정체성을 찾지 못하던 무렵이라고 작가는 회상한다.
그때 목포의 '히빠리' 골목에서 만난 동갑내기 창녀 이야기를 썼다.
그 창녀를 통해 작가 자신이 얼마나 퇴폐적이고
어두운 정서 속에 함몰되었나 깨우쳤다고 한다.
"손님 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지금도 늙은 창녀의 독백이 귓가에 맴돈다.
이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