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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늙은 창녀라서 쪼까 거시기허요?

논깡 2015. 3. 25. 13:59

 

 

늙은 창녀라서 쪼까 거시기허요?

 

무대가 어두워지자

늙은 창녀가 꿈결같이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손님을 부른다.

 

"손님. 들어가도 될게라우? 예, 그럼 실례하겄구만이라우."

 

조명이 들어오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늙은 창녀가

다소곳한 몸놀림으로 고무신을 벗자,

발 디딜틈 없이 꽉 찬 객석에 긴장감이 돌았다.

 

여자 나이 마흔 하나에 늙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류계에서는,

더구나 사창가에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니 늙었다고 할밖에.

 

그러나 창녀의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눈빛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병의 그것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섬광이 일었다.

 

"왜 하필이면 나같이 나이 묵은 여자를 찾는다요?"

 

 

 

"꾸벅꾸벅 졸다가 한소끔 꾼 그런 꿈 같은디 그거이 이십년이랑께요."

 

첫 눈에, 손님은 20여 년 동안 허구한 날 받던 그런 손님이 아니다.

뭔가 모를, 이런데 발 디딜 것 같지 않은 품새다.

 

알 듯 모를 이끌림으로 여자는 손님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난 얘기를 끌어낸다.

한물 간 몸뚱이나마 탐하기 바쁜 여느 손님들과 분명히 다르다.

 

한풀이하듯 이바구 보따리가 맥없이 풀어진다.

꽃다운 나이에 송정리역에서 만난 '푼짱네다바이(납치사기꾼)'에게 처녀를 뺏기고

목포 사창가 속칭 '히빠리' 골목에 눌러앉게 된 사연이 마구 쏟아진다.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한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 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땀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둥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늙은 창녀의 넋두리는 끝이 없다.

그깟 술 몇 잔에 취하지는 않았을 터.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자와 살림 차린 이야기,

그리고 애 밴 이야기, 떠난 남자, 죽은 애를 낳고 실성한 이야기,

그리고 그 빈 자궁을 손님들이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는, 다소 섬뜩하면서도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저 밑바닥 여자의 처절한 절규.

 

아! 나는 여자가 옷 보따리를 끌어안고 애면글면,

"아가야!"를 읊조릴 때 울음을 삼키느라 숨이 막혔다.

 

연기가 아니었다.

나 역시, 히빠리 골목의 늙은 창녀가 내 무릎을 간질이며

첩첩히 쏟아내는 말을 받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불편한 객석,

그 어느 곳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남 들을까 싶어 꿀꺽, 침 삼키는 소리는 눈물을 훔치는 소리요, 안 우는 척 하는 소리다.

 

원작자 송기원 선생이 그랬듯,

밑바닥 인생이라고만 생각한 늙은 창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월감'이었다.

 

배우 양희경이 극중에서, 아니 늙은 창녀가 부르는 노래

 

"꿈에, 참 많이도 고향을 봤지라우.

근디 꿈만 꾸면 꼭 고향은 봄이어라우.

나가 고향 떠나던 그때맹키로 말이어라우.

어지러운 거! 내 몸뚱아리

까득하게 하얀 망초꽃 흐드러지네"

 

"꽃값 오천 원으로 손님이 나를 사면,

내 고향 들샘머리 복사꽃으로 나는 손님을 사요.

손님도 나도 잃어버린 거기…,

그렇지만 차마 죽어서라도 돌아갈 거기…,

오막살이 지붕 위에 저녁별 돋아나면

우리 함께 복사꽃으로 피어날 거기…."

 

"스무 해 동안 아무 탈 없던 몸 파는 일이

피고름 엉기듯 피고름 엉기듯 몸 파는 일이,

낮은 숨결 같은 휘파람 같은 당신 때문에

어이없이 터져버리는 오늘밤 일이야

평생의 한 풀리듯 끝없이 유채꽃밭 속…."

 

"생각 같어서는 나가 가진 것을 다 드레서라도 뭐이냐,

손님 허한 디를 메꽈주고 잡소만, 그것도 맘뿐이제라우.

가진 거이라곤 썩은 몸뚱어리뿐임서 지 꼴은 모르고,

손님이 그렇게 허한 구석을 보잉께 언감생심으로 그런 맘도 안드요?"

 

 

 

양희경씨는 소탈하게도,

연극이 끝나고 간신히 분장만 지운 모습으로

관객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객석에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양희경 :

"원작자 송기원 선생이 이 작품을 두고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셨지요.

나이 오십 넘어 조금 이해가 되네요. 이 이야기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지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자신들 삶 속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이를테면 부부 간에도 장맛 같은 우정으로 곰삭혀져야 하듯,

아름다운 꽃이 꼭 아름다운 곳에서만 피지 않는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얘기지요.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양희경의 목소리를 빌려 토해내는

고향 잃은 늙은 창녀의 피맺힌 통곡이다.

 

대학로에서 관객몰이를 하고있는 늙은 창녀의 노래는

작가 송기원(60)씨가 마흔한 살 때,

'뒷골목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잡지에 연재를 하며 전국을 떠돈적이 있었다.

 

불혹을 넘기면서도 정체성을 찾지 못하던 무렵이라고 작가는 회상한다.

그때 목포의 '히빠리' 골목에서 만난 동갑내기 창녀 이야기를 썼다.

그 창녀를 통해 작가 자신이 얼마나 퇴폐적이고

어두운 정서 속에 함몰되었나 깨우쳤다고 한다.

 

"손님 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지금도 늙은 창녀의 독백이 귓가에 맴돈다.

 

이동환

출처 : 효소건강다이어트
글쓴이 : 도리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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