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주면 3.1절 이지요
3.1절 독립운동은 우리민족의 숭고한 얼과 정신이 담긴 민족저항운동 이었지요
그런데 서울 서대문에는 독립문(獨立門)이 있어요
이 독립문은 어느나라에서 독립하였기에 독립문을 세웠을까요?
일본일까요? 아니면 중국 일까요?
독립문이라 하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36년간 식민지로 살았기에
일본으로 부터 독립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독립문은 중국으로 부터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 하고 있어요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중국의 명나라 사신을 그리고 말기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이 있었어요
그리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지요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지요
중국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극심한 사대주의 즉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마치 중국의 한족(漢族)은 우월한 민족이고 우리민족은 변방에 있는 하찮은 소수민족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뒤 노골적으로 형제의 관계에서 군신(君臣)의 관계를 종용하였고
과도한 조공과 책봉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우리의 영토를 2번씩이나 침략하였지요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를 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명나라를 그리워 했어요
주자학파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죽으면서 까지 명나라를 신봉하는 유언을 남김으로
그를 따르는 전국의 유림들은 멸망하여 없어진 중국 명나라의 왕(의종)을 추모하며
제사지내는 웃지 못할일도 있었지요
그것이 이른바 속리산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만동묘(萬東廟) 이지요
1637년 음력 1월30일
청태종은 9층의 계단으로 된 수항단 장막과 일산(日傘)을 펼쳐놓고
용상(龍床)위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어요
단상아래 인조(仁祖)는 청태종을 행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는 예를 올리며 항복 하였지요
이 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겪었으며 10명중 1명꼴로 청나라에 노예처럼 끌려가
수많은 학대와 멸시를 당했으며 이때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지요
이때의 수모를 우리민족은 절대로 잊을수도 잊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중국의 명나라도 과도한 조공과 책봉을 요구 했지만
청나라의 만행은 더욱 극심했어요
청나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세자를 볼모로 잡아가는등 그 패악이 극에 달하자
청나라에 대한 반감(反感)이 불꽃처럼 일어 났으며 그 반감은 조선말기 19세기까지 이어졌지요
그런 와중에 청나라는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였고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도 서서히 음흉한 흉계를 드러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던 러시아도 믿을 족속이 못되었지요
그러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어요
이때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
그러면서 1895년부터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독립문 설계를 위해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인 '세레딘사바틴'을 영입해 왔어요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하자고 하였지요
그러자 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는 독립문 건립에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고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지요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어요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897년10월에는 역사적인 대한제국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지요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어요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장식되었지요
앞쪽의 기둥 두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 남은 부분이지요
독립문의 준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高宗)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요
당시 독립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홀로(獨) 선다(立)는 뜻으로
독립문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로서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며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첫번째 상징물이 되었어요
때문에 최초로 우리나라 태극기가 새겨진 곳이 독립문이지요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의 공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이지요
당시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태극기를 잘 몰랐어요
3.1운동 당시 민중들은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 경성 사람들은 독립문에 가서
거기 있는 태극기를 보고 그려서 사용하였지요
이처럼 독립문은 우리에게 자주독립정신을 불어 넣어 주었지요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은 헐려지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독립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기에는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도 포함되는 독립이었으며
이런의미로 고종황제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지요
그런데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면
만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지 않고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일아나지 않을수도 있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하지요
힘없고 어리석은 무능한 인조 ...
그 무능함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만 고스란히 피눈물나는 고초(苦楚)를 겪었어요
그런데 요즘 그 치욕적인 사대주의 사상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요
요즘의 세계정세가 구한말때와 흡사하게 돌아가고 있지요
중국의 내정간섭은 여전하고 평화를 가장한 적화야욕은 끊임이 없으며
주변 4강 외교는 난감(難堪)한 지경(地境)에 이르고 있지요
3.1절을 맞아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나라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
또 진정한 동맹은 어떤 나라인지를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옛부터 우리민족은 불굴의 민족이라 했지요
수많은 중국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한 일제의 강점에도 다시 일어섰지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가 있어도 우리는 건재 했어요
평화를 가장하여 철책을 걷어내고 무장해제를 한다해도 자유대한민국은 영원하지요
그러나
이런때 일수록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부르짖는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指導者)가 필요한 것인데
작금(昨今)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네요
-* 언제나 변함없는 일송처사 *-
▲ 건립 초기의 독립문(왼쪽)과, 헐린 영은문 기초(오른쪽) ...
▲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에 게재한 자신의 논평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필요성을 시사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