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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안기생 이매창

논깡 2019. 2. 24. 13:32


부안에 와서 기생 이매창을 떠올리지 않으면 개뼈따귀 풍류객이라 자처하는 내게 가당치 않는 일이기에 매창의 시비를 찿아가면서 예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정비석의 기생열전(?)을 떠올려 보지만 황진이,부용,언기,논개,이퇴계와 염분을 뿌렸던 단양기생 두향이만 생각날 뿐이다. 도서관을 뒤져도 책을 찾을 수 없어 아쉬운데 우리카페에 누군가가 정비석의 기생열전 책을 구해 줄 분이 있을라나? 예전의 기생은 종합예술인으로 지조와 절개는 물론이고 시,그림에 능수능란했으며 시문에도 일가견이 있어 해어화로도 불리었다. 부안읍내 서림공원 입구에 거문고 모양의 시비 전면에 소개된 시를 옮기면서 그녀의 일대기를 옮겨오니 울님들 모두들 매창을 떠올려 보시길...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어느 문학 모임에서 누군가가 원로 수필가 피천득 선생에게 가장 훌륭한 문인을 하나 꼽아 달라고 했다. 그 때 피천득 선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황진이라고 하여 즐겁게 웃은 적이 있다. 그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었던 조선조 여류시인이 고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화우 흩날릴제…'의 시인 매창 이향금( 梅窓, 1573∼1610)이다.


황진이를 5,6월의 장미라고 한다면 매창은 초봄에 은은하게 향기를 토하는 매화 같이 품위와 절개가 곧은 시인이라고 비유한 사람도 있다.


  이매창은 전북 부안 출신이다. 부안군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아름다운 공원 하나를 만들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567번지의 부안문화원 곁에 있는 매창공원이다. 5440평의 대지 위에 18억원을 들여 2001년 4월에 완공됐다. 문화원에서 제작한 팜플렛에는 매창공원이 만들어진 경위를 이렇게 쓰고 있다. `부안의 모든 산맥과 파도는 매창이 간 지 390년이 지나도 지금껏 잊혀지지 않고 그 솟구치는 정념과 달빛같은 순정을 오늘에 이어 오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 운명의 호흡 속에서 달빛으로 스러져 간 여인! 그러나 그녀가 남긴 달빛은 오늘로 남아 매창뜸에 새로운 혼불로 솟아나고 있다. 그녀의 문학세계를 추스르고 더욱 향토문화를 꽃피우고 면면히 이어가기 위해서 매창공원은 만들어졌다.'


16세기 조선 선조 때 부안 현리 이탕종의 서녀로 출생한 매창은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 (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불렸으며, 본명은 향금(香今)이었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워 한문시에 능했으며,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나 명성이 전국에 퍼져 그를 보려고 부안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몇 년 뒤에 그의 수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고 한다. 무엇이 당대는 물론 후세사람들까지도 그를 그토록 사랑하게 한 것일까. 그녀의 미모는 뛰어나지 못하다고 그를 본 허균이 적고 있는 것을 보아 미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시재(詩才)와 칼처럼 품고 다닌 절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기생이라는 어쩔 수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 그와 같은 삶을 살아내면서 쓴 시들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매창의 시가 있게 한 사람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천민출신 유희경이다. 그는 강화도 사람으로 1545년에 태어났으니 매창보다 28세가 많았다. 신분 때문에 벼슬은 못했지만 인품이 청결 소박하고 가례, 특히 상례에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시를 잘 지었다. 그래서 당대의 내노라 하는 명유(名儒)들과 어울릴 수 있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으고 물자를 모아 유성룡에게 보내는 등의 공을 세워 임금의 포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촌은집 행록(行錄)에 있다.


촌은 유희정이 매창을 처음 만난 것은 매창의 나이 20세때이다. 뭇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던 유희경과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던 매창은 기생과 천민, 그리고 문학 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에 쉽게 사랑의 연가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이 두 사람을 갈라 놓았다. 의병으로 출전한 유희경으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梨花雨)'전문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 이 시는 매창의 대표시라 할 수 있다.


봄비 내리고 배꽃이 비처럼 쏟아져 흩날리는 어느날 울며 헤어진 님을 추풍낙엽 지기까지 잊지 못하고 있는데 

 임은 천리 밖에 있고 외로운 꿈만 절절하다는 절창이다.


외진 변산반도 한켠에서 자신의 기구한 숙명에 오열하는 여류 시인 매창은 체읍(涕泣) 속에서도 정의(情誼)에 가득 차고 정절과 인내와 순종과 여성적 섬세함으로 충만한 눈물겨운 작가요 눈물의 시인이었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병기)


  1930년 이곳을 찾은 가람 이병기의 시조이다. 37년의 짧은 생애를 당당하지 못한 신분으로 살면서도 당대와 후대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여류 시인 이매창, 그가 쓴 시에는 그의 고상한 인격과 순결한 마음이 담겨 있기에 오늘에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나이 사십도 못 채우고 광해군 때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시 한수로 매창 이야기를 마무리 해 본다.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

 

                

    모셔온글  :이글을보고  정비석 선생의 명기열전을 구입하게된 동기가
                     낡고 낡은  만지면 부서질것같은 옛 고서  1979년 출판이니 ..세로글로 이중으로



출처 : 늘푸른 청춘
글쓴이 : 독바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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