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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 보고 싶어 (황정순 씀)

논깡 2019. 1. 11. 14:18

 

아래 글은

몇 년 전부터...인터넷 상에서 회자(膾炙)되고 있었던 글인 듯싶습니다.

(저만 모르고 있었나 보아요)

 

아마도 이 글은, (나이가 조금 지긋하신?)여성 분이 쓰신 글인 듯한데....

반대로, 남성의 입장에서도...충분히 이 같은 내용의 글을 쓸 수 있다고 보여져

이곳에 다시 올려 봅니다.

 

내용이 너무 좋아, 맞춤법 수준의 토씨 몇 개...고쳤음을 아룁니다.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 보고 싶어 (황정순 씀)

 

(하루의 일상 중에서)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 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곳에 숲이 있으면 좋겠지

개울물 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 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숲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 들고 산책 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쭈~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 거야

 

햇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래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거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 죽으로 해야지

깔깔했던 입안이 솜사탕 문 듯 달콤할 거야

이 때 나직이 모차르트를 올려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이즐넛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볼 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그래 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 때는 창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 거야


(계절의 바뀜에 따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고 싶어

장작불 같던 그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 너무 벅찼던 그 때

,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뜰 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 거야

그때쯤엔 하마~ 그곳에도 눈이 내릴까?

 

    

 

봄엔 당신 연베이지빛 점퍼 입고

,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 갈 거야

감미로운 드라마 같은 영화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넛 보온병에 담아 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저 벤치에 앉아 사진 한번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두어야지

 

그리고, 그리고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書齋)로 가는 거야


  

난, 당신 책 읽는 모습 보며

화폭 속에 내 가슴속에

당신의 모습을 담아

영원히, 영원히 간직할 거야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어

나 늙으면 그렇게, 그렇게

당신과 함께 살아 보고 싶어

   

          김환기, "달밤의 화실"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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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늘푸른 청춘
글쓴이 : 보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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