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그시절, 그때를 아십니까 - 박문사 경춘문(博文寺 慶春門)과 신라호텔

논깡 2018. 8. 29. 09:52

박문사 경춘문(博文寺 慶春門)과 신라호텔


1931년에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영혼을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다.

절 이름은 이등박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때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다

본전과 부속건물을 짓고 또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와

입구에 대문을 세우는 등 실로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공사를

시공한 업체는 일본의 ‘오쿠라쿠미토목(大倉組土木)(주)’였다.

이후 장충단에서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일본인이나

친일파 박영효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으며

태평양전쟁 중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도 거행되기도 했다.


멀리 중앙에 흥화문이 보이고 그 뒤로 2층 건물이 박문사이며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迎賓館) 자리다.


박문사는 장충단과 경희궁 정문을 발아래 두고 배치됐다. 건축 재료도 광화문의 석재를 떼어오고 경복궁의

선원전에서 목재를 뜯어와 지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일본 사찰 박문사가 그의 23주기를 기해

완공되어 1932년 10월 26일 낙성식을 가졌을 때 조선총독 이하 내외빈 1000명이 모였다. 일왕이 하사한 은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이 단풍으로 물든 남산을 배경으로 퍼져나갔다. 6개월 뒤에는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

이은(李銀) 부부가 박문사를 참배했다. 1년 뒤 이토 히로부미의 24주기에는 박문비(博文碑)가 세워졌다.

 

조선 식민지화에 지대한 공을 이룬 이또 히루부미를 기념하여 건축한 조동종(曹洞宗) 사찰 박문사(博文寺)




1909년 이토 히루부미(伊藤博文)가 쓴 책 '한국민에게 고함'에 게재된 흥화문. 경희궁의 얼굴이었던

흥화문은 이토 히루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됐다. (사진/효령출판)



경희궁 흥화문을 뜯어와 박문사 정문 경춘문으로 사용했고 1988년까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신라호텔에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지금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원래 흥화문은 구세군빌딩 자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조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뜯어 만든 박문사의 정문 경춘문(慶春門) 

흥화문은 1988년 박문사의 정문을 떠나 경희궁의 정문으로 되돌아갔다. 박문사는 사라졌는데 장충단은

복원되지 않았다. 계속 공원이었고 참배객 아닌 행락객으로 붐볐다. (1954년 사진)



박문사 종루(鐘樓)로 사용했던 건물로 환구단의 석고각 건물을 옮겨온 것이다. 지금은 볼 수가 없다.



한국 6.25 전쟁 직후 미군 지프와 전형적인 일본풍의 박문사 건물 (1954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뜯어와 주지 거처와 창고 등으로 사용했다.


박문사(博文寺)는 일제강점기에 장충단공원 동쪽 現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이며 좌측이 흥화문이다. 


1910년 무렵의 장충단공원.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막으려다 전사한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 충신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00년에 조성됐다. 대한제국의 추모공간이었던

장충단공원은 강제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위락공원으로 변질된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 박문사(博文寺)를 세우기도 했다. 사진 왼편 상단에 박문사와 석고각 종루가 보이고 있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 곳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³о화 목 한 사람들о³°`"″´·,





출처 : 화 목 한 사람들
글쓴이 : 白頭雪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