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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大韓民國 기미독립선언문

논깡 2016. 3. 1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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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지 今(금)에 十年(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 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奇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

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소잔)을 興奮伸張(흥분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 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犖(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辯(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縻(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又(우) 合理(합리)한 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의 結果(결과)가,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實積(금래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야금 正當(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야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奪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群象(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백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3장)
一.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 生存(생존), 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一.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조선) 建國(건국) 四千二百五十二年(사천이백오십이년) 三月(삼월) 一日(일일) 朝鮮民族代表(조선 민족 대표)
孫秉熙(손병희) 吉善宙(길선주) 李弼柱(이필주) 白龍城(백용성) 金完圭(김완규)
金秉祚(김병조) 金昌俊(김창준) 權東鎭(권동진) 權秉悳(권병덕) 羅龍煥(나용환)
羅仁協(나인협) 梁旬伯(양순백) 梁漢默(양한묵) 劉如大(유여대) 李甲成(이갑성)
李明龍(이명룡) 李昇薰(이승훈) 李鍾勳(이종훈) 李鍾一(이종일) 林禮煥(임예환)
朴準承(박준승) 朴熙道(박희도) 朴東完(박동완) 申洪植(신홍식) 申錫九(신석구)
吳世昌(오세창) 吳華英(오화영) 鄭春洙(정춘수) 崔聖模(최성모) 崔 麟(최 린)
韓龍雲(한용운) 洪秉箕(홍병기) 洪其兆(홍기조)

 

 
한글 기미년 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 全文)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된 양심의 발로(發露)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强權主義)에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 지 여러 천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道義)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의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자기를 일깨우기에 다급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여가를 갖지도 못하였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예부터의 잘못을 따져 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일은 다만 나를 바로잡는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 데 있지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자기 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爲政者)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合倂)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평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의 도량(度量)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한 우호적이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四億) 중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瑞光)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때의 시세(時勢)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 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전히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공 약 삼 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 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조선 민족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훈,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1.손병희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권동희

호 애당(愛堂)·우당(憂堂). 천도교에서의 도호(道號)는 실암(實菴).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함안군수(咸安郡守)·육군참령(陸軍參領)을 역임하고, 그 후 개화당(開化黨)에 들어가 혁신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 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도사(道師)가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의 핵심적 지도인물이 되었으며,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구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광주학생운동 때 다시 1년 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정계에 투신하여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 총재,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오세창

본관 해주(海州). 호 위창(葦滄). 본명 중명(仲銘).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하다가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농상공부 참의(參議)·우정국 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1902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양한묵(梁漢默)·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1906년 귀국,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별세,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저서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4.임예환

호 연암(淵菴). 평안남도 중화(中和)에서 출생하였다. 1888년 동학(東學)에 입교한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평안도 지방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싸웠으며, 1912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평양에서 민중계몽과 포교에 힘썼다. 1919년 2월 24일 고종의 인산(因山)과 교주 최제우(崔濟愚) 환원(還元)기도 참배차 상경하였다가 25일 손병희(孫秉熙)·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 등을 만나 거사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 28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신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나인협

호 홍암(泓庵).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출생하였다. 19세 때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동학농민운동 때는 나용환(羅龍煥)과 평안도 지방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6.홍기조

본관 남양(南陽). 호 유암(游菴). 평안남도 용강(龍江)에서 출생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86년 동학(東學)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首接主)·대접주(大接主)·창의대령(倡義大領) 등을 역임하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天道敎)의 도사(道師)·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7.박준승

호 비암(菴). 전라북도 임실(任實)에서 출생하였다. 1891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 수접주(首接主), 1912년 전라남도 장성(長城)의 대교구장(大敎區長)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이 되었다. 1916년 전라도 도사(道師)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0장을 나누어 주어 장성·남원(南原)·임실(任實) 등 각지에서 궐기하게 하고, 서울로 올라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8.양한묵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전라남도 해남(海南)에서 출생했다. 1894년(고종 31)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로 능주(綾州)에서 세무관리로 있다가 18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 베이징[北京] 등지를 유람,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그 곳에 망명차 와 있던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였는데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자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06년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法道師)를 거쳐 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가 되어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9.권병덕

본관 안동. 자 윤좌(潤佐). 호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하였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을 역임, 1912년 천도교에서 시천교(侍天敎)가 분리될 때 이에 가담하여 시천교 종무장(宗務長)을 거쳐 시천교에서 경영하는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다시 천도교로 개종(改宗), 도사(道師)가 되었다가 다음해 3 ·1운동에 참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審計院長)·감사원장·선도사(宜道師)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0.김완규

호 송암(松巖). 서울 출생.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 여수통신주사(麗水通信主事)·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 등을 지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봉도(奉道)·법암장(法庵長) 등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민회 재정부장(財政部長)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1.나용환

호 봉암(逢菴).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23세 때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천도교 전체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2.이종훈

호 정암(正菴). 1858년 2월 9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출생하였다. 25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고, 1998년 천도교(天道敎)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자 옥리(獄吏)를 매수, 시신을 몰래 빼내어 장례를 치르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2년 귀국,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 등과 천도교 개편에 힘써 도사(道師)가 되었다. 1919년 2월 25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손병희가 죽은 후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고문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3.홍병기

호 인암(仁菴).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다. 천도교인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천도교 장로(長老)로 있으면서 교세확장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3·l운동 때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6년 지린성[吉林省]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검거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4.이종일

본관 성주(星州). 호 묵암(默庵)·옥파(沃波). 도호(道號) 천연자(天然子). 1858년 11월 6일 충청남도 태안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金允植)·이상재(李相宰)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82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와 정3품의 위계를 받았다. 1898년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회장, 제국신문(帝國新聞) 사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고종황제탄신일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식(誤植),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그를 중상하는 측의 고의적인 행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入敎),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인쇄소인 보성사(普城社)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3·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5.최린

호 고우(古友). 도호(道號) 여암(如庵) . 창씨명 가야마[佳山麟]. 함남 함흥(咸興) 출생.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의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 해 7월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내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東京府立] 제일중학에 입학,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9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 1911년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다. 이어 보성(普城)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방안을 논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쓰고, 19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후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 ·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50년 6 ·25전쟁 중 납북되었다.


16.이승훈

본관 여주(驪州). 호 남강(南岡). 본명 인환(寅煥). 1864년 4월 25일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골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6세 때 납청정(納淸亭)에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林權逸)의 상점의 점원이 되었는데, 10여 년 후 유기행상·공장경영 등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1894년 청일전쟁 때 재산을 모두 잃었다.

다시 공장을 일으켜 서울·인천 등지를 내왕하는 도매상을 시작, 일약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1899년 돈으로 벼슬을 사서 수릉참봉(水陵參奉)이 되었다. 오산면(五山面) 용동(龍洞)에 본가를 짓고 승천재(陞薦齋)를 세워 인근의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당시 관서지방의 자산가들을 연결하여 큰 민족자본을 만들어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내세웠다.

이탈리아 사람과 제휴,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였다. 그 후 시골에 칩거하면서 나라가 기울어 감을 걱정하다 늦게나마 면학(勉學)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敎育振興論) 연설에 크게 감동받아, 당장 상투를 자르고 금주단연(禁酒斷煙)을 실천에 옮기고 승천재를 개축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열었다.

또한 신민회(新民會) 발기에 참여한 후 다시 재단(財團)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웠으며, 10년 평양에 마산자기회사(馬山瓷器會社)를 세웠다. 그 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오산학교의 교육목표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세웠다.

1911년 5월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9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15년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관련인사의 참여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그 해 일본시찰을 하고 돌아와 총독부와 교섭하여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物産奬勵)운동과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 재직 중 사망하였다. 그의 생전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오산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7.박희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1904년 평양의 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서울에 영신학교·중앙보육학교를 설립, 부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설립하여 《신앙생활》의 주필로 독립사상과 신앙운동에 힘쓰다가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잡지 《동광(東光)》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하다가 1948년 반민특위(反民特委: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8.이갑성

본관 전주(全州). 호 연당(硏堂).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醫藥)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3년 신간회(新幹會) 사건으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귀국, 1940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 1947년 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하고, 1950년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정무부장을 역임하고, 1963년 공화당(共和黨)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光復會長)에 취임,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오화영

호 국사(菊史). 일명 하영(夏英).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원산(元山) 감리교회 목사, 원산 광성(光成)보통학교 교감을 지낸 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부터 신간회(新幹會) 간부, YMCA 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9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었다.

8·15광복 후 조선민족당 당수,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 반탁(反託)투쟁위원회 위원, 19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정무위원·외교협회 이사·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정치학관(政治學館:현 건국대학) 초대 관장과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최성모

1874년 1월 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海州) 남본정(南本町)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상경하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1920년 경성(京城)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 만주로 망명하여 펑톈성[奉天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1.이필주

1869년 12월 9일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20세 때 구(舊)한국군에 들어가 8년간 장교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상동(尙洞)교회 목사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하는 상동청년회에 가입,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어 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가 상동 공옥(攻玉)소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미신타파, 계급차별의 배격, 자립정신의 고취 등을 표방하고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왕십리교회·정동(貞洞)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 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미아리·청파동·용두동·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부설 유치원·소학교·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후에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2.김창준

1919년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925년 5월 동지 37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영성(嶺城)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4명을 죽이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함경북도 일대를 뒤흔들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뒤에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川) 지방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23.신석구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은재(殷哉)이다. 충청북도 청주(淸州)에서 출생했다.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南浦) 등지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는데,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이 운동의 주도인물이 되었다. 2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감리교단 차원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결의에 반대, 신사참배·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1절기념 방송사건·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고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反動秘密結社)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전쟁 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4.박동완

호 근곡(槿谷). 경기 양평(楊平) 출생이다. 한성외국어학교·배제학당 등에서 수학, 감리교 제일교회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新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1919년 3·l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신간회(新幹會) 상임간사 등을 지내며 사회운동에 종사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在滿同胞擁護聯盟)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 상황을 시찰하고 한·중 양 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그 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5.신홍식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출생했다. 30세 때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충남 공주 감리교희에 있다가 3·1운동 때는 평양 남산현(南山峴) 교회 목사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2년형을 선고받고, 출옥 후에는 인천·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6.양전백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호 격헌(格軒).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도사로 일하다가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선천북교회에 부임하였다. 신성중학(信聖中學)·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등을 설립하였으며, 여러 곳에 양로원·고아원도 세웠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1914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19년 3월 1일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포고문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7.이명룡

본관 전주(全州). 호 춘헌(春軒). 1872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배우고 1892년 그리스도교에 입교, 신앙생활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2년 정주군(定州郡) 상업회의소 소장이 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한인토지수매를 적극 반대하였다. 1911년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복역하였다. 1916년 덕흥(德興)교회 장로가 되어 농장을 경영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조만식(曺晩植)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평동중학(平東中學)을 세워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1954년 반공연맹 이사,1955년 평북도민회 고문, 3·1정신선양회 고문,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고문, 1956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8.길선주

자는 윤열(潤悅), 호 영계(靈溪). 평안남도 안주 출생.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고, 이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29.유여대

호 낙포(樂圃).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이다. 1895년 서당을 개설, 훈도가 되었고, 1900년 의주에 양실(養實)학교를 세웠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의주 동교회(東敎會) 목사가 되어 일하면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폐교에 이른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1931년 백마(白馬)교회 목사로 있을 때 병석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저서에 《면무식(免無識)》 《위인기담(偉人奇談)》 《강도열전(講道烈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0.김병조

호 일재(一齋).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하여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임이사·임시의정원 평안도 대표·사료편찬위원·상하이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20년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24년 만주 지안현[輯安縣]에서 《대동역사(大同歷史)》 《독립혈사(獨立血史)》를 간행하고,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양성하는 한편 《한족신문(韓族新聞)》을 발행, 독립사상 앙양에 힘썼다. 8·15광복 후에는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설하여 반공운동(反共運動)에 투신하였는데 1946년 반공의거를 위한 비밀결사인 광복단을 조직,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1947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여 죽었다.


31.정춘수

본관 광주(光州). 호 청오(靑吾). 충청북도 청주(淸州) 출생.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원산(元山)에서 영국 선교사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후 상경하여 경성(京城)신학교·협성(協成)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이바지하였다.

3·1운동 때 원산 남촌동(南村洞)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종사하였으며, 1934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친일행각을 한 것이 논란이 되어 청주시 3·1공원에 있던 동상이 철거당하였다.


32.한용운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33.백용성

본관 수원(水原). 법명(法名) 진종(辰鍾). 속명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 전라북도 남원(南原)에서 출생하였다. 16세 때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名刹)을 돌면서 심신 연마에 힘썼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저서로 《수심론(修心論)》 《귀원정종(歸源正宗)》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등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 1 운동

3 · 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이다.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으로 우리 나라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 정책을 펴 우리 민족이 온갖 굴욕과 고통을 받게 되자 온 민족이 들고 일어선 독립 운동이다.

1. 배경

1910년에 일본은 강압적으로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무단 정치를 실시하여 온갖 탄압과 착취를 일삼았다. 일본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고, 국내에서는 지식인과 종교인을 비롯해 학생 · 농민 ·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반일 감정이 더해 가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민족 자결 원칙은 항일 독립 투사들에게 크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게다가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이 일본인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2. 전개

온 국민의 항일 감정이 극도에 이르렀을 즈음, 일본에 유학 중이던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국내에서도 3월 1일에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같은 시간에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고,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졌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투옥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3. 의의

3 · 1 운동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자주민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고, 세계 여러 나라에게 우리 나라의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보다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 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로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 모습
종로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 모습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는 민족 대표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는 민족 대표들

탑골 공원. 1919년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탑골 공원. 1919년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 1919년 3월 3일 서울 종로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 1919년 3월 3일 서울 종로

태극기 목각판. 3 · 1 운동 때 만세 시위에 쓸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태극기 목각판. 3 · 1 운동 때 만세 시위에 쓸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독립기념관 제4전시관에 있는 '3 · 1 정신상'
독립기념관 제4전시관에 있는 '3 · 1 정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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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시즌=
글쓴이 : 덩더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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