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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리와 백제의 건국의 진실

논깡 2015. 11. 20. 14:41

"정복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

 

일본은 한반도를 집어 삼키고 조선사를 통하여 조선의 역사를 조작한다.

 

조선의 역사가 자신들의 역사 보다 길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단군 조선을 신화의 역사로 변조 시켜 버림으로서

단군 시대는 가공의 역사로 변모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역사는 일본이 조작한 역사는 우리 스스로가 조작한 역사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역사를 근본 부터 바꿔 버렷다.

 

소중화 사상에 의해 조선은 스스로가 중국의 아류임을 자처 했고

고려 이전의 역사는 조선 자신의 역사라고 생각 하지 않은 듯 하다.

 

영락제와 건흥제를 우리 역사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표현 한다.

 

이것은 대다히 잘못된 용어 선택이다.

 

영락제와 건흥제 시기는 고구리의 최 전성기를 지나는 싯점이며

이 시기는 고구리가 "제국"의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잇엇기에 이들의 호칭은 "영락제'와 "건흥제"인 것이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이들을 "태왕"이라 부르지만 고구리를 게승했음을 건국 명분으로 내 세웟던

가라키탄/거란의 2대 황제인 태종과 다이칭구룬/청의 3대 황제인 강희제는 다 같이

 

 고담덕(高談德), 391-413년,
연호 영락(永樂) : 영락제(永樂帝)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국강상광개토경평안영락호태황제 (國岡上廣開土境平安永樂好太皇帝)

- 국강상광개토경평안영락호태황제 (國岡上廣開土境平安永樂好太皇帝) : 

-카라키탄/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추존
- 청나라 성조 (강희제)에 의해 묘호 추존
- 묘호 : 성조 (聖祖)


 

고거련(高巨連), 413-491년,
연호 건흥(建興) : 건흥대제(建興大帝)
장수홍제호태열황제(長壽弘濟好太烈皇帝)

- 장수홍제호태열황제(長壽弘濟好太烈皇帝) :

-카라키탄/거란태종 (야율덕광)이 추존
- 청나라 성조 (강희제)에 의해 묘호 추존
- 묘호 : 숙종 (肅宗)
라고 기록하여 추존 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리의 적통 후예 국가를 자부하는 우리가 이들의 호칭을 호태왕이나 광개토대왕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히 유감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高句麗를 "고구려"라고 읽는다.

그러나 高句麗는 "고구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맞다.

 

 고구리(高句麗)의 발음을 우리는 '고구려'로 발음하고 있으나 사서(삼국지)에서는

'고구리'로 발음 하라고 되어 있으며, 옥편에서도 '고구리'로 발음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 권6에서도 리음리(麗音離)라 하여 분명히 '리'로 발음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고리 즉, 고구려 : 三國志,  離卽高句麗)

사서에서 고구리(高句麗) 이외 다른표현이 있음을 알아야

고구리 역사를 바로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동음이자화 등)

 

그런데 고구리는 중국의 수많은 사서에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나타 난다.

 

     - 고구리(高句麗) :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魏書)권100, 북사(北史)권94, 남사(南史)권79, 김부식 삼국사기

     - 구리(句麗) : 삼국지(三國志)권30, 남사(南史)권79, 김부식 삼국사기잡지(雜志)6
     - 하구리(下句麗) : 삼국지(三國志)30
     - 고구리(高句麗) : 후한서(後漢書)권85, 송서(宋書)권97, 양서(梁書)권54
     - 구리(句驪) : 후한서(後漢書)85, 양서(梁書)권54, 한서(漢書)권26
     - 하구리(下句驪) : 한서(漢書)권99, 양서(梁書)권54
     - 고리(高麗) : 위서, 북사, 구당서, 당서(魏書, 北史, 舊唐書, 唐書)
     - 고리(高驪) : 송서(宋書) 
     - 고리( 離) : 삼국지(三國志)
     - 고리( 離) : 양서(梁書) 
     - 구여(句餘) : 사기(史記)
     - 색리(索離) : 북사(北史)
     - 맥이(貊耳) : 후한서(後漢書)
     - 구루(溝 ) : 삼국지(三國志)
     - 요동국(遼東國) :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
     - 평주목(平州牧) : 양서(梁書)권54

 

왜 같은 대상을 두고 이와 같이 다른 표현으로 나타 나는 것일까?

 

수백개에 이르는 비슷한 북방의 부족들을 표기하는 과정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구려와 부여는 같은 말이다.
 

삼국 사기는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기록하고

668년에 唐에 멸망 당한다고 전한다.

 

약 7백년간 존속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舊唐書><三國史記>는 고구려가 9백여년간 존속 했다고 기록 한다.

 

고구리가 망했다는 싯점은 분명 한 것 같고,

그렇다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잘못 됐다는 얘기가 아닌가?

 

고구리의 건국 시기는 분명치 않다.

 

파일:西晉時期北方各族分布圖.png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고려는 위만 조선과 함께 동시대에 존재하던 국가로

기록되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사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91년 사이에 씌여 졌으며,

위만 조선은 기워전 108년에 멸망했다

 

따라서 고구리는 적어도 기원전 108년에는 이미 존재 해 있었다는 말이며

삼국유사의 기원전 37년은 잘못된 기록인 것이다.

 

또한 <隋書 百濟傳>을 보면 백제는 고려에서 나왔으며 그 선조는 東明인데 동명의 후손인

仇台가 바다를 건너 온 백가와 함께 나라를 세웟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 대목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역사에서 혼돈스러운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주류 사학이나 재야 사학에 이르기 까지 優台仇台를 동일 인물로 간주하고

역사를 기술하다 보니까 주류사학은 대륙 백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재야 사학은 대륙 백제인 비류 백제의 존재를 기정 사실화 한다.

 

즉 대륙에 백제의 존재가 있엇다는 흔적은 분명한데 그토록 강력했다는 대륙 백제의 흔적이

어설픈 공간적 미스테리를 가지고 있기에 백제의 遙西 經營設 로 절충한다.

 

반도 백제가 세워지기 바로 직전의 사람으로 보이지만,

구태는 300여년 후 공손도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요동태수 공손도는 고구리와 北魏를 견제하기 위해 부여의 왕이었던 구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는 것이다.

 

이 당시의 국제정세는 위 촉 오라는 삼국 시대를 지나고 있는 과정에 있었으며

형제 국가인 고구리와 북위는 위나라에 공격을 받고 토벌을 당하기도 하는 중소 국가 였지만

중소형 국가중에서는 제법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특히 부여는 고구리의 속국적 위치에

있있으면서 생존하기위해 강한 세력에게 종속적 관게를 맺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와 북위가 형제 국가라는 근거는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魏와 高麗는 부여에서 함께 나왔다"라는 魏書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요동의 공손도 역시 漢代에는 요동 태수라는 봉직을 받앗던 세력이지만

후한이 무너지고 위촉오 삼국으로 나누어 지며 위나라에서 봉직을 받앗지만

자신의 세력이 강해지자 위의 사마의에게 대항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북쪽으로는 고구리와 북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부여왕 구태에게 딸을 주고

동맹을 맺는 것이다.

 

부여의 구태 역시 고구리의 속국적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손도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공손도의 집안은 위나라 사마의에게 도전을 하다가 토벌을 당하여 멸문을 당하는 인물이다.

 

이때 구태는 처가인 공손도의 땅인 요동으로 내려 오는 것으로 보이며

신망이 두터 웠던 구태를 중심으로 바다를 건너 왔다는 왜를 비롯한 해양 세력과

요동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해양 세력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해양 백제는 비류에 건국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비류와는 300여년의 시차를 가지고

건국되는 또 다른 백제인 것이다.

 

이후 해양 백제는 중국이 5호 16국 시대로 접어 드는 4~5세기에 크게 성장을 하는 것이며

이 후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세력이 약해지고 중국을 정복한 隨라는 강력한 정복 왕조가 나타 나면서

백제는 그 세력을 잃고 당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라는 나라의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원에 나타나는 濟라는 나라의 이름은 주 무왕을 도와서 주나라를 건국하고

지금의 산동 지역을 통치하는 봉직을 받는 강태공에 의해 濟라는 이름으로 나타 난다.

 

濟란 건너다 라는 뜻과 함께 나루터라는 글자이다.

 

즉 나루터란 부두를 말하는 것이며 백제란 이름은 백여개에 이르는 부두를 장악한

무역업을 하던 해양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해양 백제의 영토를 보면 현대의 아시아권의 중요한 항구를 모두 포함하는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백제를 이루고 있던 각 지역의 영주들은 담로라 불리는 태수수들이며

이들은 모두 부여하는 성씨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들의 뿌리가

부여임을 알수 잇는 대목이다.,

 

즉 扶餘 姓氏를 사용하는 階伯과 黑齒常之(흑치상지)등은 이들 백제 통치자들인 擔魯(담로)들이

반드시 血統이 같지는 않지만 부여라는 공동의 성씨를 통해서 百濟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즉 백제라는 나라를 기원전 18년년에 건국 되엇다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 때문에

漢代와 위촉오 삼국 시대를 지나는 약 300여년 동안 백제라는 그림자를 찿을 수가 없었던 것이며

이러한 백제의 건국 미스터리는 분명한 백제의 대륙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대문에

백제가 강성하던 시기에 요서를 잠시 경락햇다는 요서 경락설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주몽의 탄생은 광개토비에 나타난다.

 

광개토비에는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에 없다.

 

그런데 고주몽의 성씨는 解씨라는 주장과 高씨라는 주장으로 양분 된다.

 

好太王碑에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하백의 따님이라고 했다.

 

하백은 중국 측 기록에 많이 등장 하는데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까지는 우리 역사 학계는 호태왕비의 하백을 중국 측 신화에 나오는 하백과 동일시 했으나

최근 연구 결과 하백이란 밝음을 뜻하며 "해" 즉 태양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분명치 않은 주몽은 당시 모계 사회의 전통이 남았던 이유로

어머니의 성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주몽이 해씨가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주몽은 유화부인의 명에 따라 전국을 주유 했다고 호태왕비는 기록하고 있다.

 

주몽은 정말 고구리의 건국 신화와 같이 객지를 떠돌다가 소서노를 만나서 나라를 세웠을까?

 

解씨는 북부여 단군의 성씨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사기>는주몽을 해모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리의 건국을 BCE37년으로 고정 시키면 해모수와 주몽의 관계는 조작이다.

 

당서가 말하는 고구리의 존속 기간이 9백여년이라는 말이 맞는 다면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가 맞을 수도 있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 고구리가 등장한다.

 

사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에 싀여진 역사서다.

 

따라서 적어도 고구리는 기원전 108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삼국사기의 고구리 역사가 명백하게 잘못 기록 되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초기 왕조표를 보자.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고구려 건국자 이름 주몽(朱蒙) 

2대 유리왕(琉璃王) (재위 기원전 19년 ~ 서기 18년) 이름 유리(類利)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년 ~ 44년) 유리왕의 三男 이름 무휼(無恤).

4대 민중왕(閔中王) (재위 44년 ~ 48년) 대무신왕의子 이름 색주(色朱)

5대 모본왕(慕本王) (재위 48년 ~ 53년) 대무신왕의 차남 이름 해우(解憂)

6대 태조왕(太祖王) (재위 53년 ~ 146년) 유리왕의 六男인 재사의子 이름 궁(宮) 119살에 사망 최장수왕 

 

주몽으로 부터 시작된 해씨 왕조가 고씨로 바뀌는 때가 6대 태조 대왕이다.

 

그런데 태조 대왕의 재위 기간이 93년이나 된다.

 

고구리는 70~80여개의 대부족과 수천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나라 였으며

고구려 5부에서 왕이 선출되는 나리이다.

 

강력한 왕권 중심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며 왕은 언제든지 교체가 될 수 있었던 나라이다.

 

주몽이 단군을 이어 받지 못한 것을 볼 때 주몽은 해모수의 여러 아들 중 한명일 수 있으며

소부족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고구리의 5대왕 까지는 해씨임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6대왕인 태조왕 부터 고씨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리의 왕조가 해씨로 바뀌는 시기가 태조왕 부터로 보인다.

 

고구리가 5부 흉노의 나라임을 미루어 볼때 왕권이 바뀌는 것은 자연 스러울 수가 잇다.

 

하지만 고주몽을 고씨로 설정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배치되는 기록인 것이다.

 

고주몽의 "高"는 성씨가 아니라 성스러운 존재를 의미하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는 뜻임을 간과하고

성씨로 기록한 것이다.

 

한조조 유방이나 당낭나라 이연등을 高祖라고 하는 이유와 같은 이치다.

 

만약 고주몽이 고씨라면 그의 아들들 역시 고씨라야 하는데 그의 아드들은 연대표에서 보듯이

정권이 바뀌기 전 까지의 5대왕 까지는 해씨임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주몽의 성씨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필자는 고주몽의 성씨는 해씨임이 분명 하다는 입장이다.

 

고구리의 존속 기간이 9백년이라는 근거를 따라가 보자.

 

북방계인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지 3代째 진나라는 멸망한다.

 

이때 초패왕 항우와 지방 하급관리의 아들인 유방이 소위 말하는 楚漢 전쟁 끝에

유방이 승리하고 최초의 漢族이 통치하는 최초의 국가를 건설한다.

 

그런데 유방이 초패왕 항우와 전쟁을 할 때 유방의 후원국이 흉노고구리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묵돌 선우의 나라가 고구리라는 것이다.

 

흉노라는 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을 짱깨와 쪽발이라고 하듯이 "슌누"라는 종족을

표기 과정에서 욕으로 기록한 용어가 흉노 이다.

 

유방과 漢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 슌누가

나라 이름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대목이다.

 

유방이 중국을 통일 하자 흉노고구리는 유방에게 많은 요구를 했을 것이다.

 

이에 유방은 40만 대군을 휘 몰아 흉노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 되어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매년 공주를 상납하는 것을 포함한

조공을 하겠다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풀려 난다.

 

현재 중국의 史家들은 고구리의 개국 년도를 漢의 개국 년도 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이러한 근거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고구리를 흉노의 나라로 보기 때문이다.

 

漢나라의 개국년도는 BCE 206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리의 개국 년도를 BCE37년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668년에 멸망한 것으로 기록 한다.

 

약 700여년간 존속하였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당서에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리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살 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의 기록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f080006.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38pixel, 세로 420pixel

당나라 고종은 당 태종 이세민의 아들이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의 당나라 군주였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8년이 지난 서기 668년에 신하인 賈言忠이

30년 가까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지쳐 있는

고종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 나오는 말이다.

 

 

“고구리의 비기(秘記)에서는 ‘900년이 안 되어 80세 대장이 멸망시킬 것’ 이라고 했습니다.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진 이래로 오늘날 900년이며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라고 기록 한다.

 

구당서를 그대로 베낀 삼국사기는 이와 같이 기록하면서도 주석을 달아서

가언충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는 이중성을 보인다.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漢대로부터 나라를 가져 오늘날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라고 지적을 한다. 

 

누구말이 사실일까?

 

김부식 보다 600여년 전으ㅔ 쓰여지고 당대의 일을 기록한 구당서의 내용이 맞는 것이가?

아니면 600여년 후의 사람이며 구당서를 그대로 베낀 김부식으리 말이 옳은가?

 

그런데 진짜로 80살 먹은 당나라 장수 李勣(이적) 에 의해

668년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고구리는 멸망을 하는 것이다.

 

 

668년에 망했으니까 가언충의 말대로라면 고구리의 건국 년도는

BCE 368년 이라는 말이며 최근 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扶餘는 기원전 5세기 부터 존속햇었다고 하는데

부여와 고구리의 어원은 같은 말임을 부추어 볼 때 고구리의 역사는 부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흉노 역시 이시에 부터 기록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흉노가 배출한 영웅들의 탄생 비화는 단석괴와 주몽의 이야기가 아주 닮마 있다.

 

또한 고구리가 건국 되었다는 BCE 37년이라면 漢나라 말기에 해당 하는 시기인데도

고구리의 건국은 환타직한 신화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흉노는 고구리가 건국 했다는 BCE 37년 보다 200년전에 유방의 漢나라를 복속 시킨 正史를 가지고 있음에도

200년 후의 고구려는신화적인 나라에 불과 하다는 말이다.

 

고구리가 중국 보다 훨신 미개한 민족으로 밖에는 보이질 않는 대목이다.

 

고구리 역사가 제대로 기록적으로 반영이 되지 않고 잘려 나갔다면 백제의 역사 역시 잘려 나간 흔저이 역력 하다.

 

왜냐 하면 백제의 역사는 북부여가 그 뿌리이며 우태와 소서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에 의해 통치된 나라 이름은 부여임을 간과하고

부여의 이름을 300여년 후에 세워지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함께 뭉개 바림으로서

백제의 초기 역사는 사라져 버리고 백제에는 그 흔한 건국 신화 마져 보이지 않는 것이다.

 

수렵 유목민의 건국을 정주민족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수렵 유목 부족은 부족 자체가 나라 일 수 있으며 나라와 부족의 경계를 구분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부족 국가는 처음 부터 끝까지 한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않은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점을 이해 하지 못하고 우리 고대사를 바라 보기 때문에

초기 고구리가 흉노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붉은까마귀
글쓴이 : 세발붉은까마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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