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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시대의 잔정한 소리꾼 장사익 ... 꽃구경

논깡 2014. 10. 19. 17:52

 

 

 

 

꽃구경/장사익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동아방송

 

 

아마도 1974 ~ 5년도 어느날이었을거다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고 있었다

20대후반 친구사이로 보이는 두명이 운영하는 흔해빠진 동네이발소

한쪽 벽과 천정사이에는 적당히 유치한 유화 ..초가집과 물레방아사이로 머리에 물동이를 지고 가는 아낙네풍경.. 이런 이발소그림이 걸려있고 한쪽구석에는 연탄난로  그위에 놓인 들통에는 항상 물이 끓고 그 뜨거운 물을  다 찌그러진 플라스틱 물조리개로  찬물 적당히 섞어서 이발이 끝난 머리를 감겨주던 그런 조그만 동네이발소였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양손에 커다란 카세트라디오를 볼륨을 한껏 높여서 들고 등에도 잔뜩 짊어지고 골목마다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팔러 다니는 남자들이 있었다

대기업제품이 아니라 일본의 유명상표를 적당히 흉내낸 이름없는 중소기업 제품이었고  주고객층은 하루종일 좁은 실내에서 일해야했던  가내수공업이나 미싱업계 아니면 저런 이발소였다

라디오는 들으면서 일할수있지만 TV는 불가능하기때문이다 

 

그날 한창 내 머리를 깍던 이발사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리고 동료 이발사에게

"야! 왜 라디오를 껐어? "

그러고보니 정말 실내가 쥐죽은듯 고요한 가운데 가위질 소리만 들린다

"라디오 안껐어"

"그런데 왜 라디오 안나와?"

"잠깐 쉰다고 했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라디오가 잠깐 쉬는게 어디있어?"

"그건 그런데.. 근데 정말 잠깐 쉰다고 했어.."

그가 이발을 멈추고 라디오에 성큼성큼 다가가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자 우렁찬 음악과 아나운서의 말소리가 쏟아진다

"너 장난하냐?"

"내가 왜 라디오를 끄냐? 정말 잠깐 쉰다고 했다니까!!"

"아!  너  진짜 한번...!"

 

 

7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자타공인 대한민국 1등신문은 동아일보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기자들의 프라이드 처우 판매부수 광고 모든면에서 타신문을 압도했다 그래서 언론의 각성을 촉구하고 질타하는 시위를 세종로 구동아일보 사옥앞에서 했다

1974년 10월 바로 그 일등신문 동아일보 와 동아방송의 젊은 기자 아나운서 피디등이 주도해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을 한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3.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때까  지 퇴근하지 않는다

 

이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보도 금지의 성역은 깨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곧바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광고가 사라져 버린다  

대한민국 신문중에서 최고의 광고효과를 내던 동아일보 그리고 최고의 청취율 동아방송

그래서  돈을 싸들고 줄서서 기다렸다가 광고를 내던 기업과 광고주들이 말못할 사정을 제발 이해해달라면서 광고를 취소했고 광고가 사라진 동아일보의 공란에는 "민족의 대변지 동아를 살리자!" 라는 구호와 함께 개인의 격려광고가 실렸다

아마도 전 세계 신문사상 유래가 없는 저 기이한 모습을 보면서 당시 정부고위층은 이렇게 말했다

"금시초문이다...그것은 광고주 와 신문사 방송사간의 내부문제이다" 

이 말은 훗날 공영방송이라는 MBC가 엉망진창이 되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할때 이렇게 다시 재현된다

"정부가 방송사 내부일에 간여할수 없다"  

5.15쿠데타직후 강압적으로 헌납받은 장학회이니 사회에 환원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개인소유가 아닌 공익재단이라서 나와는 무관하고 그래서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개입할 권한이 없다"

 

                              광고가 사라진 동아일보에는 개인의 격려광고가 실린다 (오마이 뉴스 펌)

 

 

당시는 은행이 온라인전산화되어있지 않던 시절이라 지금의 무통장입금같은게 없어 송금이 쉽지 않았다

우체국에서 우편환 전신환송금을 하면 정부에 개인정보를 제공해야했다 그래서 힘들게 동아일보를 찾아가서 직접 성금을 내면서 격려광고 문구를 써야 했고 그러다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겁을 해서 쓰던 종이와 펜을 감추던 그런 서글픈 시절이었다

결국 누적되는 적자를 견디지 못한 사측은 구사대와 용역을 동원해서 단식과 농성하던 신문기자와 방송국의 피디 아나운서를 길거리로 쫓아냈고 동아의 백지광고사태는 막을 내린다

 

                                                      엉슝맘님 블로그에서 펌

 

                                   쫓겨난 그들이 광화문 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 섰다 (한겨레 신문 펌)

 

 

저 사건이후 오늘... 

동아일보는 1등인지 3등인지는 몰라도 계속 신문을 발행하고 있지만 "♬ ♪라디오는 언제나 동아방송♬ ♪" 이라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하던 동아방송 라디오은 없다

4.19혁명이후 민주화의 열기속에 장면 민주당정부는 동아일보에  라디오방송설립을 허가했고 1963년 4월 25일 동아일보사 건물에서 개국한 동아방송은 호출부호 HLKJ  주파수 1230KHz 으로 개국, 훗날 792Hz로 바뀌었다가 80년 11월 30일 신군부에의해 통폐합되어 사라진다 

 

지금도 기억나는  "유쾌한 응접실" "0시의 다이얼" "밤의 플랫폼"..  

그러나 그보다 더 폭발적이고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던 프로그램은 해방정국의 대공 수사시리즈 "특별수사본부" (정식명칭은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분실)였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을 연상케 하는 "♬쿵쾅 쿵쾅 ♪툭탁툭탁...♬." 독특한 시그널음악과 함께 시작했던 특별수사본부는 "여간첩 김수임사건" "여간첩 김소산사건" "김삼룡 이주하사건" 등이 방송되었고 그  뜨거운 인기를 이어서 줄줄이 영화화되고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당시 특별수사본부를 이끌던 이는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검사였고 영화에서 오제도검사역은 최무룡, 여간첩역활은 윤정희가 했다

 

어느 시리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남로당 접선 지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특본 수사관들이 며칠동안 잠복근무를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고  수사관들은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날 잠복근무중이던 이인수경사가 구두뒷굽이 떨어져 근처 거리의 신기료장수(요즘은 이 단어를 잘 쓰지 않고 그냥 구두수선이라고 써놓는다)에게 수선후 돈을 냈고 그 신기료장수는 품속에서 거스름돈을 꺼내어 건네주는 순간 이인수경사의 코끝에 확 풍겨오는 총 기름 냄새.... 

 

여러편의 시리즈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건 "김삼룡 이주하 사건" 이다

김삼룡은 박헌영이후 남로당의 핵심으로 조직활동의 천재로 변장에도 뛰어나 "일곱개의 얼굴" 이라고 불렀고 공식적으로는 엿장수로 분장, 활동중 아현동아지트에서 체포되었다 이주하는 남로당 정치참모 겸 김삼룡의 고문이었다

그러나 당시특별수사본부에서 방송했던 체포경위는 조금 다르다

그들이 번번히 수사망을 빠져나가자 특별수사본부의 핵심수사관 장호식경사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체포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조여오는 특본의 수사망을 주택가 쓰레기통에 숨어서 빠져 나간다

 

     60년대 쓰레기통은  이보다 훨씬 크고 이렇게 각진 직선형이 아니었고 위에는 뚜껑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펌)

 

 

당시 집앞에 저런 시멘트쓰레기통이 있다면 상당히 잘사는 상류층이었다

그래서 하루이틀 그속에 있어도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 그러나 밖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내다 보다가 그만 동네순찰중이던 파출소 신출내기 순경의 눈에 띠고 만다

순경은 뚜껑을 열고 나오라고 명령하자 그들은 특본수사관이 아니라는것을 간파했고 히히 웃으며 미친사람 흉내를 내며 버텼으나 잠시 망설이던 순경은 좀도둑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연행한다

그들은 경찰서에서도 쓰레기악취를 풍기며 미친 연기를 계속해 어쩌면 미친사람으로 풀려 났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향해서 특본의 수사를 돕던 과거 남로당 조직원이 우연히 그경찰서에 들렸다가 마주치는 바람에 정체가 드러난다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관들   그중에서도  장호식경사는 그야말로 오직 멸공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장호식경사가 자신이 모든 것을 걸었던 김삼룡 이주하의 검거를 엉뚱한 동네 순경이 해냈다는 소식에 "이제 이 장호식은 죽는다!" 라며 대성통곡을 하다가 그만 피까지 토했고 그후 그는 다소 넋이 나간듯  전에 없던 행동을 한다 지칠줄을 모르던 바위같던 그가 조금만 힘들면 "죽겠다"  소리를 연발하고 동료들과 식사를 하다가 토하기도 하고.. 방송에서 당시 동료들의 이런 증언도 나왔다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김삼룡 이주하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북한은 당시 북에 억류중이던 조만식선생과 김삼룡 이주하의 교환을 제의한다 그러나 바로  6.25가 터졌고 김삼룡 이주하는 남산 기슭 또는 한강 백사장에서 후퇴하던 국군에 의해 총살된다

그리고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관들은 

"나, 이승만은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겠다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 

이런 녹음방송을 틀어놓고 대전으로 도망간 대통령을 철썩같이 믿으며 28일까지 수사본부를 지키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식하고 철수하지만 한강다리에 새카맣게 몰린 피난민행렬의 중간에 끼어 꼼짝을 못하다가 한강다리폭파와 함께 사망한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인도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공병감 최창식대령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공병감!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지금 피난민이 많이 몰려 있습니다"

"즉시 시행해!"

명령에 따라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한강다리 6개 교각중에 2번 3번 교각이 사라지고 다리를 건너던 800 여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승만은 27일 오전 2시 신성모국방장관은 오후 2시 채병덕육군참모총장은 28일 새벽 2시에 한강다리를 넘어 도망쳤고 폭파예정시간은 28일 오후 4시였다

그게 앞당겨진 이유는 미아리에 정찰목적으로 먼저 나타난 북한 탱크 2대를 보고 군 지휘부가 성급한 판단을 한것이고 당시 국군 9만8천명중 7만4천명이 중화기 중장비 탄약 보급품을 가지고 강북에서 전투중이었다 

이 참담하고 부끄러운 사태의 책임을 단지 군인으로서 현장에서 명령대로 수행했을뿐인 공병감 최창식대령 한사람에게 물어 그를 총살하고 넘어갔다

이승만치하에서는 이 억울한 사연을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조차 할수없었던 최창식대령의 부인은 4.19혁명이후 그나마 민주화된 세상이 되자 재심을 청구했고 군재판부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따른 행위" 라며 무죄를 선고하지만 총살당한 최대령을 되살릴수는 없었다

어디 저뿐이랴?

반민특위습격폐쇄 제주4.3사건 문경양민학살사건 보도연맹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3.15부정선거 4.19혁명.... 저렇게 수많은 어린아기 부녀자 중고생 노약자들을 학살하고 죽이고 정적을 살해하고 시치미 떼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에게 책임전가하고 총살하던 그런 인사를 국부로 모시고 동상을 세우자는 세력들이 있다

 

얼마전 딴지일보에 산하님의 "레마겐의 철교 The Bridge At Remagen (1969년작)" 라는 영화에 관한 글이 올랐다

나는 이 영화를 흑백TV시절 주말의 명화로 봤다

 

                         영화 "레마겐의 철교"  우측이 크루거소령역의 로버트 본 (블로거 슐츠님의 사진 펌)

 

 

독일군의 최후방어선이던 라인강의 레마겐철교를 둘러싸고 벌어진 독일군과 미군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미군의 도하를 막기위해 다리를 폭파해야 했지만 아직 강건너에서 전투중인 독일군의 후퇴를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폭파를 미룬다

반대로 미군은 반드시 다리의 폭파를 막아 신속한 장비와 병력의 이동으로 독일의 항복을 받아야 했다

이러다보니 다리를 둘러싸고 양측 모두 큰 희생을 치렀고 마지막 순간 독일군은 폭파시도했지만 화약계산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성수대교처럼 짓지않고 독일특유의 장인정신으로 설계도면보다 더 튼튼하게 다리를 건설했기때문인지 하여간 다리는 무너지지 않았고 진군하는 미군들은 다리의 망루에 걸린 이런 글을 보게된다

"9기갑사단 덕분에 발에 물을 적시지 않고 건너는줄 알라! (Cross the Rhine with dry feet courtesy of 9th ARME Division)"

이 명판은 현재 켄터키주 포트녹스의 조지 패튼 기병기갑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분노한 히틀러는 다리를 폭파하지못한 지휘관 크루거소령(영화에서 로버트 본)을 명령불복종죄로 총살한다

명령대로 다리를 폭파하지 못했다고 총살하는 나라가 있고 명령대로 다리를 폭파했다고 총살하는 나라가 있다

 

 

                                               (0011 나폴레온 솔로의 한장면)

 

안방극장이 처음 열리던 60년대 흑백TV시절

우리 방송은 아직 화려한 액션이나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그자리를 외화가 차지했다

지금도 유명한 빅 모로우 주연의 "전투" 데이빗 젠센이 열연했던 "도망자" 그리고 "0011 나폴레온 솔로" 가 있었다

나폴레온 솔로의 정식명칭은 "엉클에서 온 사나이" 였고 당시 007 제임스 본드 의 성공에 힙입어 TV 용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기억한다

그 주인공 나폴레온 솔로 역을 로버트 본이 했고 파트너역활은 데이비드 매컬럼이었다

이 시리즈는 "007 제임스 본드"에 비해서 가벼운 코믹터치물이었다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는듯 하다가는 엉뚱하게 헛웃음을 웃게 만드는 코메디처럼  해결하는 스타일이었다 

이게 문제였다  

그뒤 로버트 본이 출연한  "황야의 7인" "레마겐의 철교" " "타워링" 등의 영화가 소개되었고 모두 로버트 본이 사망하는 진지하고 비장한 역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영화들을 보면서 로버트 본의 연기에 몰입할수가 없었다  나폴레온 솔로에서의 그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방송이 신군부에 의해서 통폐합되던 당시 마지막 고별방송을 했던 어느 방송에서 모방송인의 마지막 멘트다

 

"**방송은 이제 무거운 짐을 풀어놓고 조용히 잠들려고 합니다 **방송의 **년 역사가 막을 ...내리고...있.습니다(울먹임) 오늘 자정을 기해 여러분 곁을 떠나려 합니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입니다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울먹임)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히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제 3분남았습니다 여기는 **방송입니다"

 

그는 연예인출신이 아닌 정통 아나운서 출신의 전문 방송인이었고 그의 마지막 멘트는 거의 흐느낌이었다

그러나 그후 체제가 바뀐 대한민국 방송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고 그야말로 그의 방송인생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그를 비난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다만 0011나폴레온 솔로역의 로버트 본이 그후 아무리 진지한 연기를 해도 공감할수 없었던것처럼 그 방송인 역시 그후 통폐합된 방송의 오락연예프로에서 활짝 웃는 모습은 자꾸  고별방송 그날의 흐느낌과 겹쳐졌다 

그날 그는 고별방송에서 왜 그렇게 서럽게 흐느꼈을까? 다시 군부에 장악당하는 언론과 민주주의가 서러웠던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명박정권이후 언론, 그중에서도 특히 TV뉴스는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얼마전 자주 들리는 엉슝맘님의 블로그에서 본 모TV 자정뉴스 앵커의 클로징 멘트이다

 

"정부조직법 개편을 두고 여야가 방송장악이니 뭐니 말이 많습니다 방송계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지금 누가 방송을 쥐고 말고 한다는것인지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동아일보 광고사태와 백지신문 방송통폐합 그후의 상업방송의 재출현 미국소고기와 광우병사태 촛불시위 김재철과 mbc 종편출범 그리고 저 클로징 멘트는  두눈을 부릅뜨고 있는 지금.... 참 어처구니가 없다  

대한민국은 건망증과 코메디자질이 뛰어난 나라다

 

역사는 돌고 돈다

70년대  그 무서웠던 유신정권에 맨몸뚱아리 하나로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던 동아일보는 2013년 4월 1일 만우절날 1면 톱기사를 이렇게 낸다

"100년 언론 동아일보 정론직필의 한길을 가겠습니다"

"1964년 서독에서 뿌린 눈물에서 2013년 대한민국의 길을 찾다"

"박대통령은 서독총리에게 '우리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있다' 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한다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 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대통령의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어 버렸다 그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동아일보의 종편 사업자 선정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동아방송(DBS)을 31년 만에 회복했다는 의미가 크다"

이런 사설을 썼던 동아일보의 자회사 종편채널 채널A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해 일으킨 폭동" 이라고 주장한다

 

                                                                     경향신문 펌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관들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을 믿고 그의 명령만 충직하게 수행하다가 그로인해 어처구니없게 아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그들의 최후는 그나마 증거가 없다고 인정되지 않았다

사후 20여년의 세월이 흐른뒤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 방송을 통해 그들의 사망에 관한 증언이 나왔고 라디오방송 최고의 청취율에 힘입어 고 심현보 고 장호식 고 이인수 수사관의 공훈은 뒤늦게 인정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당시 같이 근무했던 검사와 수사관의 모임인  "일우회"는 오제도회장과 함께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합동위령제를 국립묘지에서 치룬다

 

 

우리 근대사 그 격변기의 모습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가 참 작은 나라구나 하는 탄식을 하게 된다

1950년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검사가  좌익혐의로 구속된다 

당시 대한민국 3대 반공검사라는  "오제도" "정희택" "선우종원" 그중에 한명인 선우종원검사 (그는 선우중호 전 서울대 총장의 부친이다) 의 증언이다 

"이홍규를 구속한것은 오제도검사였다" (1998년 회고록 <격랑 80년>) 

"오제도검사가 이홍규를 구속했다" (2002년 <뉴스 메이커>)

오제도검사는 당시 저 주장을 부인했다 

이회창부자도 "연행날짜 수사관 배후세력등등 다른건 다 기억나는데  담당검사 이름만은 기억나지 않는다" 라고 사실확인을 거부했다

이회창은 1997년 대선당시 부친의 좌익혐의가 논란이 되자 "모략을 당한것"이라고 분노했고 회고록 <아름다운 원칙>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우리집은 갑자기 슬픔에 잠겼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보다 크고 강하고 사악한 어떤 존재가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가족중에 누군가가 죄인으로 감옥에 가게되면 그 가족은 모두 다 죄인이 된다 이처럼 간단한 사실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가 힘들것이다

검찰에서 조사받는동안 아버지는 많은 고생을 하셨다 구타,물고문, 전기고문,잠안재우기 갖가지 형태의 고문을 직접 겪었다 아버지를 뵙고 있으면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몸은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을만큼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그무렵엔 세상이 그렇게 망가져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소년 이회창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당했다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눈물을 흘리던 그 서대문형무소

11년뒤인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사장은 혁명재판소의 사형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 당한다

이회창은 그 재판부의 일원이었다

특별수사본부 방송, 또는 영화에서 오제도검사와 수사요원들은 취조중에 좌익 피의자에게 함부로 욕설이나 따귀한대 때리지 않았고 김소산이나 김수임같은 피의자들은 사상보다는 그들에게 이용당한 면이 많다는걸 알고는 안타까워한다  오제도검사는 평남 안주태생으로 방송에서의 어투가 독특했다

"님자!  님자는 대체  죄가 있는거야? 없는거야?"

"있겠지요...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아!..." (나쁜 사람!  나쁜 사람!...)

영화에서 오제도검사는 김소산의 사형집행직전 면회를 하며 짜장면 한그릇을 사식으로 사서 먹이면서 그녀의 마지막을 가슴아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출신 여간첩 피의자들에게는 저렇게 한없이 인간적이고 여린 오제도검사와 특본수사관들이 이회창의 증언에 따르면 현역검사 신분이었던 그의 부친 이홍규검사에게는 4주동안 무자비하고 혹독한 고문을 했다는거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人間萬事 塞翁之馬)

4.19혁명이후 이승만이 쫓겨나고 장면이 최고 권력에 오른다 (그는 이홍규검사의 후원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홍규검사는 법무부 교정국장겸 대검찰청 검사로 임명된다

반면, 자유당 이승만치하에서 특별수사본부 보도연맹 국회프락치사건등 공안검사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오제도검사는 죽산 조봉암사건이 문제되어 국회에서 파면동의안이 상정되는 치욕을 당한다 비록 부결되긴 했지만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을 떠나 변호사 개업을 한다

그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던 오제도검사는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1977년 6월 10일 명동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정일형의 지역구 종로중구 보궐선거에서 오제도후보는 3만7천6백50표를 얻어 9대 국회의원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 를 통해 이미 전국적인 스타가 되어 있었던 그에게는 유세가 따로 필요없었다

오직 이 한마디...  이 한마디로 충분했다

"어제도 오제도! 오늘도 오제도!"

방송의 위력은 이렇게 크고 무섭다 그래서 다들 종편 절편 인절미 타령을 하는 모양이다

 

오제도는 11대 국회에서는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했고 1997년 박홍의 노조 주사파발언당시 후원회를 결성했고 권영해의 북풍사건을 변론했다 그리고 2001년 7월 1일 사망한다

만약 1997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이 외환위기에 빠지지 않았다면, 또는 이인제가 출마해서 여권표를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또는 이회창후보의 아들들이 병역을 순조롭게 마쳤더라면 그는 말년에 또 한번의 반전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2011년 1월 20일

"잃어버린 진보의 꿈" 죽산 조봉암선생은 사형 52년만에 대법관 전원일치로 이렇게 무죄판결을 받는다

 

"조봉암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건국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농림장관으로 우리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재심판결로 잘못을 바로 잡는다"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토지개혁 농지분배를 단행,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소작제가 폐지되고  농민은 스스로 땀흘린만큼의 댓가를 보장받게 되어 무기력과 나태와 절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토지개혁에 성공한 사례는 대한민국과 대만이 거론되고 이것은 사실상 대한민국 경제기적의 주춧돌이 되었다

결정적인 영향은 허울좋은 명목상의 개혁일지언정 북한의 토지개혁(1946년)이었다 만약 당시 농지개혁이 안된 상황에서 6.25전쟁을 맞았다면 남한농민들은 토지개혁 농지분배를 했다는 북한을 더 지지해 적화통일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49년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패해 대만으로 쫓겨난것도 국민당의 부정부패와 중국공산당이 토지개혁을 통해 중국농민층의 신뢰와 협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자만이 농지를 소유할수있다!"

최근의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정치인과 고위인사들의 얼굴에 먹칠하고 낙마하게  만드는 저 농지개혁법이 1949년 6월 21일 조봉암에 의해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다

조봉암은 그 여세를 몰아 1956년 제 3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의 절반에 가까운 216만표를 얻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 되자 1959년 7월 간첩죄로 사형 당한다 

레마겐의 철교에서 히틀러는 다리를 폭파하지 못한 죄를 물어 크루거소령(로버트 본)을 총살한다 

사형 집행직전 크루거소령은  마지막  소원으로 담배 한대를 청했고 그 소원은 이루어 진다 

영화에서 국일관 기생  김소산은 취조중에 담배를 피우고 사형 집행직전 짜장면 한그릇을 먹는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단행해서 대한민국 경제기적의 기반을 다지고 적화통일을 막은 진정한 애국자 죽산 조봉암선생은 사형 집행직전 생의 마지막 소원으로 담배 한대와 술 한잔을 청했지만 불허되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재판에서 죽산의 사형선고를 이끌어낸 이가 바로 오제도검사다

 

 

                                                         죽산 조봉암 선생 (오마이 뉴스 펌)

                                         

죽산 조봉암은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시대 항일독립투쟁으로 수없이 투옥되어 8년을 복역했고 감옥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비록, 젊은시절 잠시 공산당에 몸담기는 했지만 해방후 반공으로 돌아섰다

6.25전쟁 당시 대통령부터 저 혼자 살겠다고 거짓녹음방송으로 국민을 속이고 도망친 주제에 그것도 모자라 뒤쫓아 오는 적이 무섭다고 수많은 국민이 건너고 있는 한강다리를 폭파해서 죽이는 나라의  국회부의장 죽산조봉암은 모두 도망가버린 국회에서 국정기밀서류가 적의 손에 들어가는것을 막기위해 마지막까지 후송하다가 정작 자신의 부인은 피난시키지 못해 강제 납북으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런 또 한사람의 바보 죽산의 마지막 유언이다

 

"오늘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것이네 결국 어느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것이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2004년 8.15일 노무현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역사 바로 세우기 과거사 청산의지를 표명했고 그 발언을 계기로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가 출범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씀으로써 경계와 교훈으로 삼는것은 수천년 인류사의 확고한 가치로 자리잡은것.. 반민특위 해체이후 잘못된 역사의 규명이 되지않고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는데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 죽산의 유족조차 포기했던 재심청구와 무죄판결 사면복권을 이루어낸 힘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정과 2007년 과거사위의 조사결과 발표다

벌써 바보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다

 

 

 

 

 

 

 

 

 

 

 

 

 

 

 

 

 

 

 

 

며칠전 2013년 4월 1일

"창간 93주년 100년 언론 동아일보.정론정론직필의 한길을 가겠습니다"

"1964년 서독에 뿌린 눈물에서 2013년 대한민국의 길을 찾다"

전면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한 기사는 A3면 4면까지 이어졌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286   동아방송 마지막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849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65158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545.html   조봉암

 

 

 

제세산업 이창우

 

http://marinport.egloos.com/5994607

 

존경하는 출판사 사장님

사장님 요구대로 하고 보니 어째 귀빼고 조뺀 당나귀 꼴이구려

 

출처 : 문화·연예
글쓴이 : Kur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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