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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물연구] 分斷의 땅에서 나온 ‘세계평화의 傳令’ / 50년 한국외교사 ‘한강의 기적’ 이뤘다!

논깡 2006. 11. 4. 07:45

[인물연구] 分斷의 땅에서 나온 ‘세계평화의

傳令’

차기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50년 한국외교사 ‘한강의 기적’ 이뤘다!



▶주요 약력

1944년 충북 음성 출생
1970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85년 미 하버드대 행정학 석사
1970년 제3회 외무고시 합격
1974년 주 인도 2등서기관
1978년 주 유엔 1등서기관
1980년 유엔 과장
1992년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부위원장)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
1996년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1999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준비위원회 의장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1년 주유엔 대사(제56차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2003년 대통령 외교보좌관
2004년~ 외교통상부 장관
2006년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차기 유엔 사무총장. 그는 주변의 시기를 받지 않는 1등의 처세술과 몸을 낮추면서 더 높이 점프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으로 통한다. 적을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외교술이고 성공 비결이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면 전쟁의 반대는 전쟁이 된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평화를 깨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평화를 위해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변명이고 모순이고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진정한 반대는 무엇인가?

동서고금 최고의 병법가인 손자가 꼽은 최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교다. 서희의 담판도 싸우지 않고 영토를 회복했기에 그 어떤 장수의 전공보다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외교관이야말로 최고의 장수다. 이런 외교관은 이상적이다. 현실적으로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 성공적인 외교관이다. 만장일치의 전폭적 지지로 유엔의 수장이 된 반기문(62) 사무총장도 어쩌면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은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는지 모른다.

그 역시 “흐르는 물처럼 행동하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지치지 않는 비결”이라고 자랑한다. 적어도 명목상으로 그는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자리에 올랐다.



특진 후 ‘죄송’편지 회람

그러나 그가 걸어온 40년 가까운 외교 인생에서 이렇다할 성공작은 없었다. 그런데도 안에서는 외교부 장관이 됐고, 밖에서는 유엔의 수장이 됐다.

반 총장은 ‘잘나갈 때’ 더욱 몸을 낮추고 조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 ‘신동’ 소리를 듣고, 자라서는 공부에서나 업무에서 언제나 ‘톱’을 달렸지만, 그는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었다. 1987년 이사관(2급)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을 때도 그는 조심성으로 무장돼 있었다. 당시 반 총장은 외무부 내부의 시선을 의식했다. 인도 주재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안기부장을 거쳐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1급이 맡던 의전비서관에 3급인 자신을 발탁한 데 이은 특진이어서 더욱 그랬다.

반 총장은 그때 100명이 넘는 동기와 선후배들에게 1주일에 걸쳐 일일이 편지를 써 보냈다. ‘일찍 승진해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겸손의 극치로 볼 수 있지만,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적을 만들지 않는 외교술로 평가할 만하다.

반 총장은 심지어 딸들을 결혼시킬 때도 비밀에 부치다시피 했다. 차관과 비서관 이외에는 대부분 결혼식이 끝난 후에야 공지를 보고 알게 됐다. 공사를 분명히 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조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잘나갈 때’ 몸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못 나갈 때’는 더욱 몸을 낮출 수 있다. 2001년 그가 차관 시절 겪은 이른바 ‘ABM사건’ 이후 유엔에서 입지를 다진 과정을 보자.

그해 2월 한·러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당시 합의문에 포함돼서는 안 되는 문장이 들어갔다.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ABM은 부시 행정부가 폐기를 주장해온 조약이었다. 한국 측 외교 실무자가 저지른 어이없는 실수였다. 이 때문에 한·미 사이에 엄청난 파문이 인 것은 물론이다. 그때까지 초고속 승진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반 총장에게 최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전시장을 지난 10월14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제8대 사무총장에 공식 선출된 반 총장은 수락 연설을 통해 “세계 인권과 평화 증진,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측은 한국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다음달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수도 없이 사과해야 했다. 결국 반 총장은 이정빈 당시 장관과 함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다. 문책성 경질이었다.

그런데 4개월 후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이 실업자나 다름없는 그를 불렀다. 제56차 유엔총회 의장이 된 자신의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주유엔 대사를 겸하는 비서실장이었지만 통상 국장급이 맡는 일이었다. 차관을 지낸 그로서는 백의종군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아끼는 이들은 만류했고, 그를 시기했던 이들은 비웃었다.



워커홀릭, 차분함 속의 민첩함

그러나 그는 기꺼이 한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엔으로 들어간다. 모두 마지막 관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유엔과 깊은 인연을 맺고, 그곳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아 오늘날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계기가 됐다. 따지고 보면 겸손의 처세가 빚어낸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다.

반 총장은 보기에도 ‘충청도 양반’ 같은 사람이다. 점잖은 외교관의 인상 그대로다. 다소 느린 말씨,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표정은 차분하고 우직해 보인다. 어찌 보면 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는 외교관이 안 됐다면 교사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교장선생님으로도 잘 어울리는 이미지다.

외교부 안에서는 그런 그가 내유외강형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말 그처럼 순하고 부드러운 인상 속에 치열한 승부욕이나 강한 집념 같은 것이 내재돼 있을까.

그는 근면성실함을 넘어 워커홀릭이다. 지난해 5월 스승의 날을 기념해 서울 배화여고에서 ‘하루교사’로 수업을 진행할 때도 한 학생이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는지 묻자 “일이 많은 날에는 18개 일정을 소화한 적도 있다”며 “그러고 나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라고 말했다.

또 “1주일에 조찬회의를 세 차례나 하고 매일 10~20분씩 시간을 쪼개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귀가시간은 10시 반을 넘기가 일쑤”라고 했다. 집에 와서도 다음날 스케줄을 점검하느라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쉴 틈이 없다고 했다. 마음 놓고 제대로 휴가를 떠난 적도 없다.

미국과 유럽 등지로 출장을 떠날 때는 시차를 감안해 비행기에서 숙박하는 일정을 잡는다. 그의 업무량은 가히 기록적이다. 장관직을 맡은 2004년부터 총 105개국을 방문했으며 재직 기간의 3분의 1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가 참가한 외교장관회담만 무려 321회나 된다.

외교관이 된 후에도 공부는 계속됐다. 1979년 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 시절, 그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불어를 익혔다. 이번 사무총장 선거 캠페인 중 프랑스와 북서 아프리카의 불어권 국가 정상 및 외교장관들과 불어로 대화하고 연설도 불어로 해 이목을 끌었던 것도 그때 익힌 불어 실력 덕분이다. 독어 실력도 1998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할 당시 짬이 날 때 공부한 결과다.

자신보다는 늘 일이 우선이었다. 국제연합과 과장을 맡은 1980년 인도 출장길에서 장티푸스에 감염됐을 때 그는 일을 다 마치고서야 입원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이 한창이던 1991년 부친상을 당하고도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에야 아버지 빈소를 찾았다.

이 사연은 모 방송사의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2001년 ABM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했을 때 반 총장은 그렇게 고생한 것이 억울했던지 “지난 31년간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 죽고 싶다”며 착잡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밤잠도 줄이는 그가 낮잠을 허용할 리 만무다. 그런 탓에 반 총장이 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간부들은 점심식사 후 10∼20분의 토막잠도 함부로 잘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식곤증에 시달리다 못한 간부들은 부하직원에게 “혹 장관께서 찾으시면 ‘화장실에 갔다’고 전해달라”고 지시하고는 잠시 몰래 잠을 청할 정도라고 한다.

이렇다할 운동을 하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다. 그는 한때 “일하는 것 자체가 체력관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외교부 최고의 체력으로 통한다. 장관이면서도 필요하다면 연일 계속되는 야근도 불사한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우고도 끄떡없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2박6일, 24박26일의 해외출장 일정을 거뜬히 소화해 낸다.

반 총장이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인 유순택 여사의 이해심과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결혼 직전 유 여사의 어머니는 딸에게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한 외교부 직원은 “그처럼 부드러운 성격도 일할 때는 그렇게 독하게 변할 수가 없다”고 감탄한다. “말하는 속도는 느리지만, 행동하고 일하는 속도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차분함 속에 민첩함이 있다는 말이다.



케네디를 만난 외교관 꿈나무

그의 워커홀릭은 공부벌레였던 학창시절부터 생긴 고질병(?)이다. 고향인 음성에서는 신동이었고, 초·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충주에서는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언제나 1등은 그의 차지였고, 그의 동생들은 하나같이 ‘반기문 동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취미도 특기도 모두 공부였다.

대학 때 두뇌 회전에 좋다고 해서 바둑을 한번 배워볼까 생각하다가도 얼마 못가 “공부하는 것이 더 즐겁다”며 포기했다(물론 외교관이 돼서는 일이 너무 좋아 아직까지도 바둑을 못 배웠다). 1970년 외무고시(3회)에서 최성홍 전 외교부 장관에 이어 2등으로 합격했을 때는 “내 평생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라며 자책했다고 한다. 그는 끝내 연수 과정에서 빼앗긴 1등을 찾아왔다.

공부 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중독성이 높은 과목이 영어였다. 영어는 외교관을 꿈꾸게 했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외교관이 되겠다며 영어를 배우기 위해 동네 선교사를 찾아다니고는 했다. 충주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영어 선생님이 “오늘 배운 문장을 10번씩 써 오라”고 숙제를 냈는데 그는 그 문장을 통째로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썼다.

고향 선배인 안영수 경희대 교수는 당시 반 총장이 무엇이든 영어로 된 것이면 미친 사람처럼 달달 외우고 다녔다고 기억한다. 충주고 1학년 때는 반 학생을 위해 영어 교재를 만들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읽고 쓰는 영어다.

듣고 말하는 영어는 학교가 아닌 비료공장에서 배웠다. 고교시절, 인근에 있는 충주비료공장에는 미국인 엔지니어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마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준 것이다. 그들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 학생 중 반 총장이 가장 열심이었고 실력도 최고였다. 덕분에 그는 적십자사가 주관한 영어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이름을 날렸다.

이때 입상한 것이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당시 적십자사는 외국 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인 ‘비스타(VISTA)’를 주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4명의 학생을 뽑았는데 그 가운데 반 총장이 포함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은 물론 충주시 전체가 들썩였다. 이듬해인 고3 여름방학 때 반 총장은 말로만 듣던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1962년 충주고 3학년인 반 총장(왼쪽에서 두번째)은 적십자사가 주관한 외국 학생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돼 미국 방문의 기회를 얻는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외교관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왼쪽)
서울대 졸업식 때 부인(당시 애인) 유순택 여사와 함께.(오른쪽)


학교에서는 미국 방문을 앞두고 몇 달간 머리를 기르라고 했다. 충주여고에서는 미국인들에게 선물로 줄 복주머니까지 만들었다(그때 복주머니를 미국으로 떠나는 반 총장에게 전달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 바로 후에 반 총장의 배필이 된 유순택 여사다.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결혼해 1남2녀를 낳았다.

맏딸 선용(36)씨는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막내 딸 현희(31)씨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 사무소에서 국제기구 초급전문가(JPO)로 일하고 있다. 아직 미혼인 아들 우현(33)씨는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1962년 여름, 미국 땅을 밟은 그는 그곳에서 인생을 바꿔 놓을 역사적 인물을 만난다. 바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세계 각국에서 선발돼 온 학생들을 초청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케네디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한 동양인 학생에게 주목했다.

그가 질문을 던졌다.

“꿈이 무엇인가?”

반기문 학생은 제법 유창한 영어로 자신있게 대답했다.

“외교관이 되고 싶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품어 왔던 외교관의 꿈은 미국 대통령과의 약속으로 확고한 목표가 됐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은 두고두고 그의 인생의 이정표가 된다.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에서 평생을 보내는 순간마다 그는 그때의 사진을 꺼내 보며 꿈을 키우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당시 미국 방문이 반 총장에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또 한 사람이 있다. 한 달간 미 대륙을 여행할 때 4일간 머무르며 신세를 졌던 집의 여주인 리바 패터슨이다. 지난해 8월, 반 총장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패터슨을 초청했다. 외교통상부 접견장에는 9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반 총장은 “내게는 아주 소중한 인물”이라고 주위에 소개했다.

반 총장은 당시 귀국해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관이 된 뒤에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빠짐없이 패터슨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접견장에서 패터슨은 43년 전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꿈 많던 한국인 학생을 떠올리며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패터슨은 “외교관의 꿈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외교부 장관까지 됐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고 감회를 밝혔다. 반 총장은 며칠 동안 머물렀을 뿐인데도 그 만남을 평생의 인연으로 간직한 것이다.



위로는 ‘깍듯’, 아래로는 ‘미소’

반 총장의 지난 외교부 인생은 상당히 운이 좋았다. 관운 하나는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는 승승장구했다.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유엔대표부 1등서기관, 외무부 국제연합과 과장 등을 거치며 유엔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1985),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1987), 외무부 외교정책실장(1995) 등 외교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심지어 아랫사람의 실수로 겪은 위기가 윗사람 덕으로 기회가 될 정도니 보통 관운은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된 소감을 밝힐 때 ‘행운’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관운도 그가 만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위는 위대로 아래는 아래대로 ‘외교’를 잘한 덕에 관운을 얻었다는 말이다.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물론 아랫사람을 깔보는 법도 없다. 화를 낼 법한 순간에도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이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말이다. 고위직에 오른 후에도 그는 목에 힘을 주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성실과 겸손은 말단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장관이 된 후에도 차관 시절 함께 근무한 참사관이 중병으로 입원하자 여섯 차례나 병문안을 다녀올 정도로 옛정을 잊지 않았다. 한 인사는 “반 총장은 사람의 마음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를 다소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도 그와 30분만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간적 매력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아랫사람의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질책하지 않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잘못된 점을 짚어 주는 아량이 있다고 한다. 아랫사람과 면담한 후에도 자리에 앉아 배웅하는 법이 없다. 반드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어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그는 한때 ‘주사’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고위직으로 올라가서도 말단 직원처럼 자질구레한 일까지 손수 챙기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때 반 총장의 집에서 가사를 도왔던 김 모 씨는 “그는 아무리 지위가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절대로 반말을 하거나 하대하는 법이 없는 신사”라고 전했다. 김 씨는 반 총장을 아직도 ‘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의 ‘사람관리’ 비법은 정성과 성실이다. 회의나 외출 중에 걸려온 전화 메모가 있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회신한다. 연하장을 보낼 때는 밤을 새워서라도 일일이 자필로 직접 적어 보낸다. 이런 비법은 자신이 오래 모셨던 노신영 전 총리에게 배웠다고 한다.

반 총장은 외교부 안에서 이렇다할 기수가 없다. 그래서 ‘특기’로 불린다. 어느 기수에도 속하지 않아 외로울 수 있었지만, 그는 어느 기수로부터도 견제받지 않을 수 있었다. 특유의 성실과 신뢰로 상하좌우 어디에도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를 데리고 일했던 상관들은 하나같이 그를 좋아했다.

1972년 외무부 연수를 마친 그의 첫 근무지는 인도총영사관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후 외교관 인생에 영향을 끼친 노신영 주뉴델리 총영사(전 국무총리)를 만나게 된다. 인도와의 수교를 위해 파견된 노 총영사는 그의 영어실력과 성실함을 한눈에 알아챘다.

이듬해 한·인도 국교 수립으로 주뉴델리 총영사에서 주인도 대사가 된 노 전 총리는 공관장회의에서 당시 사무관이던 그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노 전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인도에서 처음 만난 반기문 사무관이 이후 나를 도와 많은 일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반 총장이 2000년 주오스트리아 대사에서 차관이 됐을 때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장관에 임명된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 씨 같은 사람을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장·차관 모두 도중하차하기는 했지만-.

반 총장이 거의 만장일치로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주위의 신뢰를 쌓는 탁월한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엔 내부에서도 그렇고, 대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국제연합과 차석, 주유엔 1등서기관, 국제연합과 과장 등으로 젊은 외교관 시절부터 유엔 관련 업무를 많이 맡으면서 나름대로 유엔 내부에 자신을 알리고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북미국장, 주미 공사 경력은 그를 미국통으로 만들었다.

‘스타’ 외교관은 아니었지만, 반 총장에게 세계 외교가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1997년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때 밀사로 활약한 것이다. 당시 황씨가 중국을 거쳐 국내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중국 측은 황씨의 망명이 외교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해 황씨를 제3국에서 한 달간 체류하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이었던 반 총장이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을 만나 황씨의 체류를 요청해 한 달 뒤 황씨의 망명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런 계기적 성과보다 반 총장 특유의 원만하고 무난한 대외관계 스타일이 유엔 사무총장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 지난해 9월 이후 한국 정부가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반 총장을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정한 이후 반 총장은 지난 2월 출사표를 던질 때까지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를 돌며 물밑작업을 했다. 조용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부시가 면접을 봤다고?

특히 미국이 반 총장을 적극 지지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반 총장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됐을 때 영국 BBC는 “유엔의 상임이사국들, 특히 미국은 세계적 외교스타보다 세계적 수준의 행정가를 원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부 외신 보도에서는 반 총장이 사무총장이 되면 그동안 중국에 다소 치우친 듯한 한국의 대미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9월15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반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선거 출마에 관심을 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을 시작하면서 배석한 반 총장에게 “행운을 빈다(Good luck!)”고 말했다.

양국 정상 오찬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반 총장의 출마 이야기를 꺼내자 부시 대통령은 반 총장에게 “왜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고 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반 총장이 “한국이 유엔의 도움을 많이 받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켰는데 이제 한국이 유엔에 기여해야 할 차례”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부시 대통령은 반 총장에게 “훌륭한 후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회담 배석자들은 “미국 대통령이 마치 유엔 총장 후보를 상대로 면접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부시 행정부는 어쩌면 반 총장을 상당히 신뢰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사태가 터져나오면서 반 총장이 발목 잡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을 때도 부시 대통령이 아시아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혀 반 총장의 행보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지원사격을 해준 셈이다.


소신보다는 원칙이 우선

반 총장 역시 외교부 내의 대표적 미국통이다. 1993~94년 제1차 북핵위기 때 주미대사관 정무공사로 있으면서 한·미 간 대북정책 조율의 실무총책을 맡았다.

조심성이 많고 보수적인 성향도 부시 행정부나 유엔 상임이사국들의 지지를 받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은 적어도 급진적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업무 스타일이 그렇듯 인사에서도 특출나다고 발탁하는 법이 없다. 원칙과 ‘스탠더드’를 중시하는 그에게 도전적이거나 도발적인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초년 때부터 그는 야망보다 안정을 우선 고려했다.



▶1. 케네디스쿨 재학 중 1984년 보스턴 자택 앞에서. 왼쪽 위부터 부인 유순택 씨, 첫째딸 선용 씨, 반 총장, 둘째(아들) 우현 씨, 막내딸 현희 씨.
2. 1983년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스쿨 연수 시절.
3. 충주 교현초등학교 시절 동생들과 함께. 뒷줄 가운데가 반 총장. 3남2녀의 장남으로 집안을 돌봐야 했던 그는 생활비를 줄이려 첫 근무 예정지인 미국 대신 물가가 싼 인도로 자원했다.



외무고시를 2등으로 합격한 후 1등으로 연수를 마친 그는 주미대사관에 발령이 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안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려면 물가가 싼 후진국으로 가야 얼마라도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유로 주 인도대사관에 자원한다.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출세의 기회를 잡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2003년 김선일 씨 피살사건 당시에도 그는 여론보다 원칙을 고수했다. 이라크 무장단체의 인질 살해 협박이 임박했는데도 그는 흔들림없이 파병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알 자리라’ 방송에 출연해 석방을 호소하는 등 팔방으로 외교채널을 가동했지만 ‘기술적으로 우를 범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공식적인 ‘외교부 장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소신이나 파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도 잘못했지만 국민도 위험지역에 가면 스스로 신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발언을 해 더 큰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는 여론의 거센 퇴진 압력에도 스스로 물러나지도 경질되지도 않았다.

반 총장은 지난해 ‘일일교사로’ 배화여고에서 수업했을 때 그 학급의 급훈이 ‘꿈과 땀’인 것을 보며 “여러분 나이에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며 “목표의식을 갖고 공부하면 꼭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반 총장은 우리가 아는 여러 공식을 현실로 입증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을, ‘열심히 일한 사람이 성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그리고 ‘적을 만들지 않아야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지혜를 모두 보여준 셈이다.

유엔 상임이사국의 지지 때문이든, 미국 행정부의 지원사격 때문이든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의 탄생은 한국도 세계도 놀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벌써 국내에서 외교관을 장래 희망으로 정한 아이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학부모들은 조기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하기에 현실적 한계가 있지만 192개국의 연합체인 유엔의 사무총장은 국가 원수에 준하는 의전이 주어지는 영예로운 자리다. 5만 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는 거대 조직을 경영하는 CEO이기도 하다. 중임하는 것이 관례인 만큼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10년 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반 총장은 다음달부터 연말까지 인수작업을 거친 뒤 내년 초부터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한다


헝가리 국민봉기가 일어난 지난 1956년 초등학생이던 그는 학교 대표로 다그 함마슐트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유엔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외무고시에 합격했을 때, 외교관이 됐을 때, 그리고 외교부 장관이 됐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반 총장은 이제 다시 추억의 사진 한 장을 꺼내볼 것이다. 사진 속에는 웃고 있는 케네디 대통령과 담소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외교관을 꿈꾸던 반기문 학생도 있다.







 학생은 끝내 꿈을 이루었고 더 나아가 유엔의 수장이 됐다. 이제 미국 대통령과도, 그 어떤 나라의 대통령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지금은 꿈을 묻고 답하는 평화스러운 대화를 할 수만은 없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의 국제정세는 자신이 외교관을 꿈꾸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복잡해졌다. 더구나 지금은 북핵문제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극도로 긴장이 고조된 난국이다.

반 차기 유엔 사무총장은 국가 간 불협화음을 조율하는 ‘하모나이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국제분쟁 해결을 위한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유엔 조직을 개혁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지위보다 힘든 역할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은 ‘외교가의 교황’이라는 영예로운 이름과 함께 여전히 ‘강대국의 꼭두각시’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그의 성공 비결인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언제나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모두에게 반감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모두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에게 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외교부 안에서 적을 만들지 않은 것이 외교부 장관을 만들어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192개국 모두에 반감을 주지 않으면서 국제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자칫 약소국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또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어느 쪽을 적으로 만들더라도 과감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더구나 인류 평화가 위협받는 순간이라면.

그는 지난 2월 출마의사를 밝히면서 “사무총장으로 뽑아 준다면 모든 회원국에 봉사하겠다”며 “본인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분단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사무총장에 오른 그는 제3세계 출신 사무총장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힘든 시련을 만날 수도 있다. 10·9 북한 핵실험으로 그는 첫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



이임광_월간중앙 객원기자 (llkhkb@joins.com


[2006년 11월호] 2006.10.25 입력

출처 : [인물연구] 分斷의 땅에서 나온 ‘세계평화의 傳令’ / 50년 한국외교사 ‘한강의 기적’ 이뤘다!
글쓴이 : 경천애인 원글보기
메모 : 아 땅에서 나와서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이기를 앙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