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살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 작다고 생각하지 말자!우리는 현인류문명의 부모민족이다. 부모민족이라면 부모민족답게 세계를 대상으로 거대담론을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하고 세계평화의 주역이 되야 한다. 우리 민족은 1만년이라는 자랑스러운 민족사와 인류를 변화시켜온 위대한 문화유산을 피속에 가지고 있는 위대한 민족이다. 단지 내부적으로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확장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나라와 민족을 좀 먹는 내부의 썩은 고름과 암덩이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의 강대국으로 구성된 안전 이사회 중심의 유엔은 이제 모든 회원국들이 기아.병.핵.민족과 종교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세계평화문제를 결정하는 민주적 시스템으로 전환되야 한다! 이에 널리 인류를 이롭게 하겠다는 홍익인간이념을 민족적 가치관을 가지고 2천여년이라는 세계 최장기간의 단군조선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이 유엔을 변혁시키는 인류중심국가가 되야 한다. 그리고 북한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로써의 핵문제에 있어 미국 오바마의 핵없는 세계구상선언은 환영할만한 선언으로 결코 선언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전 세계 핵보유국가들이 합의철폐할 수 있도록 미국이 솔선수범하여 핵폐기에 나서야 한다.[윤복현]
[보도자료]
▲ 카다피 유엔연설 도중 지켜지지 않는 유엔헌장을 비판하며 찢어버리는 행동도 보여주었다. © 자주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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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유엔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의 제국주의 군사패권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자주권과 호혜평등을 강조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의 박수를 받았는데, 올해에는 더욱 막강한 반제자주의 신념으로 무장한 리비아의 무하마드 카다피 대통령이 유엔 단상에 처음으로 올라 미국과 그 동맹국 중심의 유엔질서를 날카롭게 비판, 단번에 유엔총회 스타로 급부상하였다.
그는 주어진 15분간의 연설보다 훨씬 긴 96분간, 때로는 유엔헌장을 찢어버리기도하고, 연설을 빨리 끝내달라는 쪽지를 집어던지며, 연탁을 두드려대기도 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약소국을 공격하는 테러 이사회"라고 하는 등 폭탄급 발언을 마구 난사, 유엔 총회장을 거의 초토화시켰다.(아래 주요 연설내용 참조)
이란 마무드 아마디 네자드 대통령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라는 등 철학과 사상적 뼈대가 서 있는 차원 높은 연설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제국주의 패권정책과 자본주의의 탐욕을 질타하고 정의와 존엄성이 존중되는 지구촌을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 리비아 카다피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
"'아프리카 1천 왕국의 이름으로' 서방 세계에 대해 7조7천700억 달러를 보상을 요구한다.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 나라들로부터 아프리카는 그 돈을 되돌려 받을 자격이 있다"
"유엔 헌장에는 모든 회원국이 크든 작든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들과 다른 나라가 평등한가? 아니다!"
"유엔이 한 나라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얘기는 유엔헌장에 나와 있지 않다. 어느 나라든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유엔에 대한 존경은 없어졌다. 1945년 유엔 창설이래 약 65개의 전쟁이 있었고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다른 약소국들을 2류국가로 경멸해 왔고 자기들의 이해관계에만 충실해 왔다"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닌 '테러이사회'로 불러야 한다"
"상임이사국의 거부(비토)권을 폐지하고 이사국을 아프리카, 아랍국가, 이슬람국가까지 확대해야 한다."
"오바마는 `아프리카의 아들'이다. 기쁘고 자랑스럽다. 오바마는 향후 4년 또는 8년 동안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이며 그가 물러나게 되면 우리가 뒤로 후퇴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오바마가 미국에서 영구집권해야 한다."
"신종플루는 군사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생물무기가 아니냐"
◐ 이란 아마디 네자드 대통령의 유엔기조연설
"이란이 건설하고자 하는 방향은 정의와 정신, 존엄성에 기초한 공고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란은 정직하게 다가오는 나라들과 손잡을 준비가 돼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와 교류를 원한다면 근본적으로 지구촌을 개혁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려고 한다."
"진정성이나 철학이 없다면 불의나 차별적인 문제는 고쳐지지 않을 것"
"종이돈만 찍어내는 아무 가치도 없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더 이상 수백억 달러를 집어 넣을 필요가 없다"
"이른바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이 종말을 고할 때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런 기본적 원칙들을 위반해 왔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심판관이나 집행관이 될 수 없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의 땅을 강탈했다"
"이란은 평화적 목적으로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고 되풀이하여 주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그것을 문제삼아 왔다. 미국민들을 포함하여 국제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진정으로 국제사회가 변화될 것을 고대하여 왔다."
"수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었고, 부상당했고, 건축물들과 상하수도가 파괴되었고, 지역안보가 위협당하고 있다. 남미를 포함하여 지구촌 곳곳에 군기지를 확장하면서 다른나라들과 친선, 연대를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개혁하기 위해 유엔은 개혁되어야 하며 동시에 몇 개 나라들만 혜택을 보는 그런 유엔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민족만큼 우수한 두뇌와 어질고 용맹스러운 기질을 가진 민족도 없다. 우리 본래의 한국의 DNA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우리의 민족정통사서 [한단고기]를 전 국민이 읽어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조상을 바로 찾아 상실한 민족정신을 되찾아야 할 때다. 한인-한웅-한검을 모시는 민족성전을 세워야 하고, 전국에 한인-한웅-한검 동상과 사당(성황당의 실체)을 세워 섬겨야 한다. 후손들이 자기 역사와 조상을 모르고서서야 뿌리와 정신을 어떻게 알 것인가? 얼라사대매국매족세력이 주인행세를 하는 대한민국이다. 중국.일본민족과 중국.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니 중국과 일본은 후손된 도리로 한국을 부모국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 역사의 도리에도 맞으며, 앞으로 그렇게 되리라 확신한다. 민족통일과 아시아공동체의 구심과 평화사상은 단군왕검과 홍익인간이념밖에 없다. 단군조선은 중국.한반도.만주.일본열도에 홍익인간이념을 전파하고 높은 문명을 보급하며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천자개념도 조선에서 나왔다고 중국인들 스스로가 문헌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산동지역의 태산은 동방의 천자단군에게 중국지역의 단군조선 제후들이 문안인사를 하던 곳인데, 이후 중국 왕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하늘에 보고하고 제사지낸 장소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윤복현]
한라에서 흑룡강까지 한민족은 하나다
대한민국 영토는 민족사의 개념에 부합되도록 헌법에 규정해야 한다
100년 전 조선영토(노란색)
[한단고기]가 증언하는 단군3조선 영역도
[한단고기]에 보면 산동반도아래 양자강지역까지를
회.대라 했으며, 번조선 단군의 관리감독을 받는 지역
단군조선연구의 권위자이자 고대 갑골문.문헌연구의 전문가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가 설정한 단군조선의 최저 마지노선 영역(난하 위쪽의 중국 하북성지역까지는 단군조선의 영역이다)-국제법을 위반한 일제에 의해 100년 전 대한민국의 영토인 간도를 양도받은 중국은 우리민족의 터전이자 단군조선의 영역이였던 하북성.만주.연해주 지역까지는 대한민국에 양도해야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한치영 & 한태주 (2000)
01. 광개토대왕
02. 고구려 아이들
03. 듣고 싶어
04. 하늘의 아들
05. 백암성
06. 행진곡 하늘의 아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를 바로 인식하고 미래를 올바로 설계하며 전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야 하고 둘째는 지리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이 어떠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고조선은 과학기술 수준도 매우 높았다. 그 예로 청동기 제조기술을 들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의 용도에 따라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달리하여 그 강도를 조절하였다. 청동무기를 만들 경우에는 주석의 비율을 낮게 하여 강도는 떨어지지만 질긴 청동을 만들었고 청동거울을 만들 경우에는 주석의 비율을 높혀 강도가 높은 청동을 만들어 광택이 잘 나도록 하였다. 청동의 가공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고조선의 유적에서는 0.2 밀리미터의 가는 청동실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청동으로 이렇게 가는 실을 뽑는 것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쉽지 않은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더불어 이익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이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지배층은 궁궐이나 종묘 등을 크게 짓지 않았고 왕능도 크게 만들지 않았으며 관직도 꼭 필요한 것만 설치하였다. 대신들 사이에는 폐백을 주고받지도 않는 등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낭비를 막았다. 그러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수확의 20분의 1이라는 아주 적은 세금을 받았다. 그리고 사회신분에 따른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홍익인간 이념이 정치와 사회생활에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능력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도 부분적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고토였던 지금의 랴오시(遼西)지역을 완전히 수복하였고 백제는 지금의 뻬이징(北京)과 천진(天津)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산똥성(山東省) 지양쑤성(江蘇省) 저지양성(浙江省)에 이르는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서기 246년 경부터 쒜이(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340년 이상 지배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李正己) 일가는 산등성의 쯔칭번진(淄靑藩鎭)을 독립왕국으로 발전시켜 국명을 치(齋)라 부르며 55년간이나 탕(唐)나라에 대항하였고 그 뒤를 이어 장보고(張保皐) 대사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과 왜열도의 남부를 지배아래 넣어 해상왕국 무역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위에서 말한 우리 민족의 여건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리적인 반고립성, 홍익인간 이념,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불균형 등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첫째는 우리 민족의 능력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은 매우 우수한 문화를 지니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은 원래 능력있는 민족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여건이 우리 민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므로 그 우수한 능력이 발휘될 것이다. 전남 해남 출신
한민족의 원형 단군조선과 민족의 미래
역사인식의 의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
윤내현 교수
▲ 단군조선의 상징 - 청동검(대륙/비파형.한반도/세형)
우리 민족의 능력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비슷하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문화에 외래적인 요소가 강하다. 예컨대 열국시대에 이르면 불교가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근세조선에 이르면 유학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근대화 이후에는 서구문화가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나 현대의 사회와 문화 속에는 이들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근대사나 현대사의 연구만으로는 어느 것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 요소인지를 밝혀내기 어렵다 그리고 외래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와 혼합되었는지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외래문화 요소가 혼합된 이후의 문화수준으로는 진정한 우리 민족의 능력을 평가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의 우리 민족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하고 그것이 후대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연구를 고대사부터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었던 시대는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세운 첫번째 국가로서 이 시기에 우리 민족도 형성되었는데 아직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 같은 외래 문화가 들어오지 않은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출현한 이후 세계의 모든 지역의 문화는 주변의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하였으므로 고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민족 문화도 완전히 독자적이고 고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이 시대까지는 아직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지 못하였고 고조선에 크게 영향을 줄만한 문화가 주변 지역에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은 독자적인 문화 요소를 비교적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문화를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시대의 익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민족 본래의 모습과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은 서기 전 2333년에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일찍 건국되었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영토가 서쪽으로는 뻬이징(北京) 근처에 있는 지금의 루안허강( 河)에 이르렀고 북쪽은 어르구나허강(額雨古納河), 동북쪽은 헤이롱강(黑龍狂). 남쪽은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에 이르러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조선의 문화수준은 매우 높았는데 전기와 중기는 청동기시대였고 후기는 철기시대였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을 건국하기 전인 서기 전 2600∼2500년 경부터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후앙허강(黃河) 유역에서는 서기 전 2200년 경부터,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서기 전 1700년 경부터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은 후앙허강 유역보다는 300∼400년, 시베리아 지역보다는 800∼900년 정도 앞서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매우 선진한 민족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에는 방직기술도 매우 발달해 있었다. 고조선의 한 유적에서는 모직물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을 분석해 본 결과 양털실과 개털실을 섞어 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이 오늘날 생산되는 모직물 가운데 다소 거칠은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시대에 이 정도로 질이 좋은 모직물을 생산했다는 것은 당시 방직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은 경제기반도 튼튼하였는데 농업과 목축업 및 수공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표범 말곰 등의 진귀한 동물 가죽과 고급 모피의류 모직의류 및 활 화살 화살촉 등의 무기를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고조선의 유적에서는 당시 중국 옌(燕)나라 화폐였던 명도전(明刀錢)이 많이 출토된다. 5,000여 점이 출토된 유적이 있으며 3,000∼4,000여 점 출토된 유적은 여러 곳이다. 이렇게 많은 수량의 중국 화폐가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된다고 하는 것은 고조선이 중국과의 교역으로 매우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은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나라에 충성하였고 그 결과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고조선은 중국 연(燕)나라의 침략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예기치 않은 침략을 받은 고조선은 일시 후퇴했지만 바로 이를 격퇴하고 옌나라의 동부를 빼앗아 침략을 응징하였다. 당시 연나라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수백 년간 중국 내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을 많이 쌓은 나라였는데 이를 격퇴하고 그 땅을 빼앗았다는 것은 고조선이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건국된 나라였고 문화적으로 선진한 나라였으며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였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였다 우리 민족은 중국보다 약 130여 년 앞서 나라를 세웠는데 왜열도(倭列島)는 이 시기에 신석기문화 수준에 머물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은 원래 다른 민족보다 아주 유능한 민족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왜열도에 진출하여 서기전 3세기 경에는 청동기와 철기의 혼합문화인 야요이문화(彌生文化)를 출현시켰고 서기 4세기 경부터는 고분문화(古墳文化)를 출현시켰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가지고 간 수준 높은 문화와 정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왜열도에 소국들을 출현시켰고 이것들이 통합되어 서기 670년에 이르러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도록 하였다.
우리 민족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구려를 침략한 513만 여명의 쒜이(隋)나라 군사를 무찔러 그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을지문덕 장군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세계 해전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을 배출하였다. 요즈음에는 세계적인 예술인과 운동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 민족의 능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우리 민족의 국가는 여러 개로 분열되었고 국력의 신장이나 문화의 발전이 중국에 비하여 매우 더딘 형상이 일어났으며 근세조선에 이르면 중국의 정치권과 문화권에 편입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일제에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원래 유능했던 우리 민족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지리적인 반고립성(半孤立性)이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여서 외부와의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였고 만주의 북쪽이나 동북쪽은 자연환경이 열악하여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을 곳은 오직 중국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중국은 광활한 대륙에 연접해 있고 자연환경이 아주 다른 여러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거주민이 다양한 민족과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지에 여러 다른 문화 전통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후앙허강(黃河) 중류유역에서 건립된 고대국가가 계속 확대 성장하면서 이들과 접촉을 통해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었다.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 진한(秦漢)제국과 쒜이(隋) 탕(唐)제국 등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민족은 중국에 비하여 지리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둘째는 홍익인간 이념이 가져다 준 평등관념이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근대화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통치자의 권한이 강화되어 전제화되어 갔고 사회의 계급 또는 신분이 더욱 확대되어 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회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면 농민봉기가 일어나 왕조가 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계급간 또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을 통한 자극과 영향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출해 냈다. 근대화 이전의 사회에서는 계급간 또는 신분간의 갈등이 역사 발전의 동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더불어 이익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홍익인간 이념을 그 핵심 사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분간의 갈등이나 투쟁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와 같은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동학농민전쟁마저도 왕조를 뒤집어엎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주도록 왕에게 건의하자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은 우리 민족의 왕조가 중국의 왕조들에 비하여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였다. 중국의 왕조들은 상왕조(商王朝)가 600여 년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300년을 넘지 않았는데 대개 농민봉기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왕조 고조선은 2,300여 년, 신라는 거의 1,000년이었고 다른 왕조들도 대개 500년이 넘었다 이와같이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나지 않고 왕조가 오래 유지되었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사회의 변화가 적어 발전속도가 늦었다는 것은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는 고유문화와 외래문화가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이념은 평등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사회가 발전하면서 신분의 차이는 확대되어 갔다. 따라서 현실의 신분 차이를 인정하는 논리가 지배층에게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국시대 말기에 불교가 들어왔다. 우리 민족에게 전달된 불교는 대승불교였다.
대승불교에는 윤회(輸廻)와 업보(業報) 사상이 들어있다. 인생은 윤회하는 것이며 현실 세계에서의 신분은 전생의 업보로 얻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이나 귀족들의 현실 신분을 인정하는 논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초기 불교는 왕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승불교의 교리는 지배이념이 되었고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그 아래에 있게 되었다.
그후 근세조선에 이르면 사회신분을 한층 더 구체화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유교가 정치와 학문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이전의 지도이념이었던 불교는 유교 아래 있게 되었고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불교 아래 있게 되었다.
근대화 이후에는 기독교 문화가 중심이 된 서구의 문화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화를 일찍 수용한 사람들이 개화한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군림함에 따라 기독교 문화(서구 문화)가 사회를 선도(先導)하게 되었다. 근대화는 민주사회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상하가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기독교 문화가 지도 이념처럼 되었고 그 아래 유교문화가, 유교문화 아래는 불교문화가, 불교문화 아래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있는 상하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열국시대 말기부터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의 필요에 따라 외래문화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였다. 따라서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는 밑바닥에 깔리는 현상을 가져와 그것을 천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지난날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인 무속이나 국악을 천시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구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와 외래문화가 대등한 관계에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 부족하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핵심으로 하고 거기에 외래문화를 접목시키는 지혜가 부족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을 보자.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쎌러드 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맛있는 쎌러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재료들이 싱싱하게 각각 제맛을 지니고 있어야 하듯이 미국이 이상적인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의 문화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야만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창조가 일어나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미국인들의 생각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은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으므로 서구 문화와 접촉하기 전에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하여 낙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그들의 고유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이로움도 있었다. 그러한 일본은 서구 문화와 접촉하면서 그들의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그것을 핵심으로 하여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것을 혼(塊)으로 삼고 서양의 것은 기술로 이용한다는 이른바 <화혼양재(和魂洋才)> 정신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전통문화는 서구문화와 접촉과정에서 큰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동력이었던 것이다.
▲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와 한민족의 고대 문자들
그렇지 않다.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지리적인 고립성은 어떠한가? 과거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워야 문화 교류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교통시설의 발달은 비행기로 하루면 세계 어느 곳에나 갈 수 있게 되었고 통신기술의 발달은 한 순간에 세계 어느 지역과도 통화나 정보교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개방정책을 취하여 국가나 민족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따라서 지리적인 고립은 이제 의미가 없게 되었다.
홍익인간 이념은 어떠한가? 근대 이전의 역사는 신분간의 차등이 확대되고 통치자의 권력이 강화되어가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와 반대로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홍익인간 이념은 역사 전개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더불어 행복을 느끼는 그러한 사회를 추구하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표현은 다르지만 바로 홍익인간 이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추구해 온 이념은 이제 전 인류가 추구하는 이념이 되고 있다.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불균형은 어떠한가? 근대화 이전의 사회는 사회신분이 차등화된 사회였기 때문에 문화도 그 문화를 향유한 사람들에 따라 차등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민족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사회를 추구하고 있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문화는 상하의 수직관계를 벗어나 수평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근래에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부분적으로나마 대우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상황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상황은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장래는 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의 변화를 우리 민족만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이나 나라도 똑같이 맞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결코 우리 민족에게만 유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이나 나라가 갖지 못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 윤내현 교수
둘째로 남북의 분단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민족의 비극이었지만 평화적으로 통일만 된다면 엄청난 창조를 해내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한 주민은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 조직 속에 살면서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서로 만나 자극과 영향을 주게 되면 우리 민족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종교의 분포이다. 우리 민족의 사회에는 민족종교 ·불교 ·유교 · 천주교 · 개신교 등이 거의 비슷한 신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이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다.
넷째는 홍익인간 이념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표현은 다르지만 이것은 오늘날 인류가 추구하는 이념이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그러한 이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그것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어느 민족보다도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왔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우리를 외면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 사회를 다양성을 지닌 사회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 그것이 외래문화와 수평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찰 뿐만 아니라 그 핵심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본질을 이루고 외래문화는 기능적인 것으로 이용되도록 해야 하며 그것을 교육하고 일상생활에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1999 년 11월 27일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열린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강좌내용이였습니다.
윤내현 교수/약력
약력
단군조선(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단국대 부총장 역임)
고 조선(단군조선)은 우리 역사상 첫번째 국가이면서 단일국가로는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서쪽은 지금의 북경(北京) 근처에 있는 난하, 북쪽은 중국과 몽골의 국경인 얼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흑룡강(黑龍江), 남쪽은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을 국경으로 한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평양성-백악산 아사달-장당경을 거쳐 다시 아사달로 네 번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이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면 그 영토는 상당히 넓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13세기 중국 사학자 증선지(曾先之)가 그린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의 지도
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만주를 포괄하고 있으며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인 만리장성은 발해의 서북쪽에서 끝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 제국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한 곳은 요동(遼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기 전 221년(진시황 26)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요동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시기는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으로, 고조선(단군조선)시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요동의 위치인데, 고대의 요동과 지금의 요동은 그 위치가 다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 있었으므로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고조선과 진의 국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어디일까.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요동은 갈석산(碣石山) 지역이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효무본기(孝武本紀) 등에 등장하는 갈석산의 위치는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과 일치한다. 난하 하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보다 1,000리 서쪽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사기’ 몽념열전(蒙恬列傳)에는 ‘국경에 쌓은 만리장성이 임조(臨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진서’(晉書) 당빈전(唐彬傳)에는 ‘만리장성을 복구했는데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만리장성의 끝 부분이 요동의 갈석산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십구사략통고’의 지도에는 발해의 서북부에 요수(遼水)가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서쪽으로부터 이를 관통하여 요동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는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갈석산을 끼고 흐르는 큰 강은 난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갈석산은 노룡현(盧龍縣)에 있는데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만리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전’이 편찬된 당(唐)시대의 노룡현은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이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에서는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었으며(또는 끝났으며) 그 지역이 요동이었다고 했는데 ‘태강지리지’에서는 만리장성이 낙랑군의 수성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점이다.
수성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하나였다. 낙랑군은 이전에는 위만조선의 영토였고 그 이전에는 고조선 영토였다. 그러므로 위 기록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이 원래 고조선 영토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석산이 국경선상에 있었음을 말한다.
낙랑군 수성현은 원래 고조선 영토 가운데 맨 서쪽 국경 지대에 있었으며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갈석산을 서쪽 경계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위치하여 그 동쪽은 고조선이었고 그 서쪽은 중국이었던 것이다.
난하 유역의 갈석산이 서쪽 경계
여기서 요동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요동이란 원래 동쪽의 먼 곳이라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동쪽의 국경지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이동하였다.
오늘날 요동이 고대의 요동보다 동쪽에 있는 것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어 중국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고증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서기 전 3세기 진시대의 상황이다. 그런데 진시대보다 앞선 시기에도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이보다 동쪽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서쪽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염철론’(鹽鐵論)에는 연(燕)나라는 갈석산을 요새로 하여 사곡에 의해 끊기고 요수로 둘러싸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 당시 연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 제국보다 앞선 전국시대에도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갈석산과 지금의 난하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은전(殷傳)과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서기 전 1100년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고조선이 서기 전 1100년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인데 ‘한서’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는 후대의 낙랑군 조선현이 바로 옛날 기자가 망명해 살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현은 수성현과 함께 낙랑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기자가 망명해 살았던 곳은 갈석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전 1100년께도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었으며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서한은 초기에 고조선과의 국경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옛 국경 초소를 수리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서한은 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므로 이 기록은 진·한시대 이전에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난하 유역보다 서쪽에 위치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대체로 난하와 갈석산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때로는 그보다 훨씬 서쪽에 있기도 했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예(濊)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인 것이다.
당시 예는 지금의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지역을, 옥저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고구려는 평안북도와 중국의 길림(吉林)성 남부 및 요녕(遼寧)성 동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모두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 한사군급열국기(漢四郡及列國紀)에는 한(삼한)과 부여를 포함한 비류·시라(신라)·고구려·남옥저·북옥저·예·맥 등 여러 나라는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하였다. 이 지역들이 고조선의 영토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부여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동일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나라에 제천의식이 있을 때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이를 부여에서는 영고, 고구려에서는 동맹, 동예에서는 무천, 한에서는 5월제와 10월제라고 하였다.
부여는 언어와 법칙 등 여러 가지 일들이 고구려와 대부분 동일하였고 고구려 사람들은 부여의 별종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조선 사람들,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
종교와 언어 그리고 풍속까지 같아지기 위해서는 같은 나라 안에서 오랜 기간 함께 생활하면서 깊은 문화적 교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부여·고구려 등 여러 나라가 독립국이 되기 이전 이 지역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었던 나라는 고조선밖에 없다. 이로 보아 부여 지역도 고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는 오늘날 중국·몽골의 국경을 이루는 얼구나하와 중국·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흑룡강을 북쪽과 동북쪽 국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북쪽과 동북쪽 국경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강화도의 마니산 산마루에는 참성단이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도 하는 바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이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지금도 그러한 전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경기도 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옛날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산골 사이에 나뉘어 살아 여섯 마을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진한 6부로 되었다가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그 남은 백성들이 진한의 6부를 형성했다가 신라를 건국한 중심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은 북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유민이라면 당연히 그곳에서 이주해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남은 백성’(遺民)이라고표현했지 ‘흘러들어 온 백성’(流民)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찍이 진한의 6부였다가 신라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진한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한(삼한)시대의 그 지역 명칭이다.
이로 보아 이들은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그 지역에 살았던 토착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신라가 건국되었던 지금의 경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과 같이 한(삼한)에도 5월제와 10월제라는 제천의식이 있었다. 그 기간에 행해지는 의식이나 풍속이 거의 같았다. 이러한 종교적 풍속의 동일성은 오랜 기간 같은 나라 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이를 공유해야만 형성되는 것이다.
한(삼한)에는 국읍에 하느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한 사람씩 있었고 그 거수국(제후국)에는 소도라는 종교적 성지가 있어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종교를 계승한 것이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고조선에는 신시라는 종교적 성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신단과 신단수가 있었다. 소도는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실들은 한(삼한) 지역도 고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삼한)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남쪽 해안선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제왕운기’ 한사군 및 열국기에는 한(삼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했다고 했는데, 위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정황들로 미루어 그것은 그 영토까지를 포괄한 의미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남쪽 국경은 한반도 남부 해안선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하면 고조선의 국경은 대부분의 시기 서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북쪽은 얼구나하, 동북쪽은 흑룡강, 남쪽은 한반도 남부 해안선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은 지금의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영토로 하는 큰 나라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 자료로도 뒷받침된다. 적석총·석곽묘·석관묘 등 석재를 사용한 무덤들과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이 난하를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그 서쪽의 중국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난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가 동일한 문화권, 동일한 통치 지역에 속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에 서쪽 국경에 변화가 있었다. 서기 전 190년대에 난하 하류 유역에서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그 영토를 대릉하 유역까지 확장함에 따라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대릉하 유역이 되었고 그 후 서기 전 107년에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됨에 따라 지금의 요하가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명칭을 처음 사용한 문헌들
· 한국에서는 고려 인종때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처음이다. 고려 충렬왕때 일연 선사가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썼다.
·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자가 지은 ‘관자’(管子)라는 책이 처음이다. 이후 ‘사기’ ‘상서’ 등에 조선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