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경어체로 글을 쓰니 정말 어색하네.ㅋ 서프에선 역시 막말이 제격인데...ㅋㅋㅋ
서프라이즈 대표논객 김동렬이 아주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 이제는 미국, 일본, 유럽에서 배운거 가지고 행세하는 사대주의자들은 안된다.
우리 친노세력은 유불선 동양사상에 대해 한가락하고 어쩌구 저쩌구..."
기억나는 눈팅들 많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가만보면 말로만 동양사상이지 사실은 자기가 비판하는 진중권과 다른 게 없다고 봅니다.
독일서 공부한 진중권이 미학을 논할 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진중권의 미학은 서양철학을 바탕으로 하니까요.
그럼 친노세력은 김동렬 생각처럼 그 뿌리가 서양이 아니고 동양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중권과 김동렬은 생각만큼 그리 크게 차이가 나는 논객이 아닙니다.
서양사를 보면 그리이스의 민주정을 민주주의의 뿌리로 봅니다.
물론 여자가 참여할 수 없다든지, 노예가 참여할 수 없다든지 하면서 그 한계를 명시하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우리들 머리 속에는 '그리이스' 하면 노예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떠오릅니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우리 스스로 냉정하게 비판을 하는 거는 같은데...본질이 노예제라는 것은 그야말로 비판거리로 치부되고, 민주정에 방점이 꽉 찍힙니다.
부가적 비판이 오히려 그리이스를 더 빛내주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게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아니...사실은 전세계 지식인들이 하는 일이죠.
사실 친노세력이 내세우는 참여정치도 그리이스의 민주정에서 크게 벋어나는 것이 아니예요.
오히려 그리이스의 민주정이야 말로 친노세력들이 꿈에도 그리는 100% 참여정치의 표본입니다.
적어도 노예가 아닌 성인남성들은 모두 직접 참여정치에 참여를 하니까요.
친노세력의 꿈이 '깨어있는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 아닙니까?
친노세력은 그리이스의 데모크라시를 비판하기 힘듭니다. 자기 부정이 되니까요.
그런데 그리이스의 데모크라시가 과연 민주정치일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이스의 체제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거꾸로 노예제 없이 데모크라시가 가능했을까 반문을 해보죠.
만일 노예들에게도 투표권이 있었다면? 노예들이 직접민주주의에 자기 주인의 한 표와 동등한 한 표로 참여를 했다면?
그래도 데모크라시가 작동을 했을까요? 절대로 가능할 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이스의 민주정치란 사실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지배계급끼리 터놓고 협의하던 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리이스 시대의 지배계급이라는 것이 대체로 서로 고만고만한 수준이라는 환경이었기에 데모크라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게 로마시대로 넘어가면 막강한 권력의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직접민주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이 줄어들고...
궁극적으로는 황제1인 독재국가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청동기 그리이스나 철기 로마나 공히 노예제 국가입니다.
김동렬은 철기가 도입되면서 노예해방 어쩌구 하는데...무슨 소설을 쓰는자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서양철학의 원류가 그리이스, 로마에서 나오는데, 결국은 노예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프랑스 대혁명도 부르조아 혁명입니다. 배고픈 서민을 위한 혁명이 아닌 부유층 자유민을 위한 혁명이지요.
동양은 다릅니다.
맹자가 시민의 참여를 주장하지는 않지요.
그 대신 군주를 배, 백성은 바다에 비유합니다.
바다가 성나면 배는 뒤집히는 것이죠.
맹자가 말하는 바다에는 평민과 노예의 구분이 없습니다.
바다는 그야말로 백성의 바다입니다.
파도가 배를 뒤집을 때 이쪽 물은 되고 저쪽 물은 안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바다는 통째로 하나의 바다입니다.
그리고 맹자는 끊임없이 지배자들을 일깨우려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말고, 덕치를 펼치라고 주문합니다. 그러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맹자가 비록 현존하던 지배-피지배 구조를 혁파하지는 못했지만, 근본적인 철학적 태도 자체가 하늘의 뜻이 백성의 뜻이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위해 노력봉사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그리이스의 철학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최대의 목표는 지배구조의 정당성 입증일 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위해 어찌어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피지배계층은 노예이니까요.)
소크라테스왈... 지배자는 남들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지배자가 되는 것이고, ...
지배자가 됨으로서 자기가 피지배자들에게 이익을 보기는 커녕,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설파합니다. (플라톤 국가론)
이것은 지배구조의 합리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은 맞는 말이지요.ㅋ 노예가 철학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지배계급에게 부여된 특권이지요.
그런데 공자는 다르게 이야기했습니다. 군주에서 저 밑바닥 백성에 이르기 까지 모두 예를 알고 인을 알기를 바랬습니다.
공자나 맹자나 참여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계급들 만의 참여를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맹자가 궁극적으로 씨를 뿌린 것은 백성들의 '결정권'입니다.
파도가 뒤집으면 배는 뒤집혀져야죠.
그것이 바다(백성)의 권리이자 배(군주)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시대로 옮기면, 지난 탄핵사태 때 왜 시민들이 분노해서 촛불을 들었지는 설명이 됩니다.
탄핵 이전이나 이후나 여론은 이미 노무현 전대통령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민들은 노무현을 위해 거리로 나왔을까요.
노무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서 나왔던 겁니다.
우리의 축적된 역사와 전통에서는 '참여'가 아니라 '결정권'이 먼저 입니다.
그것이 시민들의 진짜 관심사입니다.
참여하라는 것은 니가 책임지라는 것이죠.
결정권은 너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참여는 주인이나 합니다.
멋있어 보입니까?
주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예 또는 하인이 필요합니다.
그 구도에서 아랫것들은 참여가 철저히 배제당합니다.
동양에선 아랫것들이 '참여'는 못해도, 대신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은 그 결정권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고착화된 지역구도가 그것을 막고 있지요.
결과는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를 외치면 빼앗긴 결정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고대그리이스가 주인과 노예라면, 지금 우리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입니다. 또 지배지역과 피지배지역입니다.
경상도 찍으면 경상도 서민들이 득을 봅니다.
전라도 찍으면 전라도 서민들이 득을 봅니다.
서프에선 이게 아니라고들 하더군요. 사실을 왜곡하면 안되는데요.
전라도 찍으면 호남기업들에게 기회의 창이 열리고, 호남출신들이 기업에 취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경상도 찍으며 그 반대현상이 나오고...
이게 엄연한 현실인데, 현실을 부정하면 해결책도 엉뚱한데서 찾습니다.
참여를 아무리 외쳐봐야 호응이 없는 것이 달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님.
먹고살기 바쁜데 참여는 무슨 참여...
찍어 줬으면 잘 하면 되고,,못하면 다음엔 떨어뜨리면 되지...이런 생각이 바뀌기 어렵습니다.
이러니 참여를 외치는 세력이 보기엔 대다수 국민과 유권자들이 계몽의 대상이 됩니다.
대체로 참여정부를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본질은 소통의 실패입니다.
'참여'라는 구호로 서민들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참여해서 뭘 어쩌자구요?
국민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판단하는 세력은 교만해지고 나중에 폭주합니다.
'무지몽매한 너거들은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에 스스로가 악마로 변합니다.
국민들은 그 자리에 그냥 있는데 말입니다.
엽전은 안돼...이거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인식의 본질은 식민지 근성이지만 그 밑바닥에 서구적 계몽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과잉을 야기하죠.
참여...
참여해서 뭘 어쩔건데요?
이걸 파고들어가 보면 참여의 기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참여정치하면 지역주의 극복가능한가요?
택도 없지요
경상도에서 참여해 봐야 경상도 찌고...전라도에서 참여해 봐야 전라도 찍습니다.
애초부터 철학의 부재인데...ㅎ
그리이스 지배계급이 당시 노예제 사회구조를 유지하려고 만든 방법이 바로 100% 참여정치입니다.
참여정부시절 참여에 관심많았던 친노세력이 계급적으로는 주로 중산층 이상, 지역으로는 호남보다 영남에 치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사회적 포지션이 로마의 막강 군벌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예나 비참한 농민도 아닌 그리이스 유권자 정도의 레벨이기 때문이지요.
상대적으로 고급교육을 받고...주로 도시에 거주하고...그렇다고 권력집단에는 포함되지 못한 쁘띠부르조아 육두품 상위 중산층...
이런 계층들이 참여에 대한 열기가 높지요.
물론 자기 아래 서민들을 보고 참여의 욕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위의 권력집단을 보고 참여의 욕구를 느끼지요.
이런 세력들은 서민에게 양보 안합니다.
영남의 개혁지지 유권자들도 호남에 공장 많이 생기는 것은 별로 안좋아 합니다. 가능하면 자기 지역이 더 잘되길 바라지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노예들에게 양보하는건 상상도 못하지요.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이미 득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이니 뭐...
친노세력은 서민들과 분리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이미 분리되었지요.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심판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은 더 많은 중산층을 몰락시키고 더 많은 배고픈 서민들을 양산합니다.
결국 제발 등을 찍는 것이죠.
참여를 외치는 세력을 지지할 유권자 층은 시간이 갈수록 더 줄어드니까...
중요한 것은 참여가 아니라 정책입니다.
정책 안에 철학이 있는 것이죠.
참여 자체가 철학을 담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짱방에서는 다문화/외국인 근로자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못합니다.
불법체류자를 본국송환시켜야 된다는 이야기를 못합니다.
휴머니즘으로 포장하지만...사실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존재해야 득을 보는 계층이 있지요.
그들이 서민계층은 아닙니다.
민주당이 서민정당은 아닙니다.
전병헌이를 통해 커밍아웃을 한거죠.
그럼 친노세력은 친서민세력일까요? ㅎㅎㅎ
소크라테스에게 피지배계층을 위한 철학을 기대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