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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올에 대한 비판글중 구름 이경숙의글

논깡 2009. 8. 22. 00:54

난 구름이의 글은 저속하지만 해석은 올바르다고 본다

구름 이경숙에 대하여 이곳 카페지기께서 비판하므로 그내용을 일부 옮겨본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한번 판단해보고 댓글좀 남겨주시기 바란다...

 

 

도덕경 제1장의 첫 문장은 이런 소리로 시작한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




 

도올의 명저 <노자와 21세기>에 이 문장이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한번 보자.

우리의 건아 도올 가라사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시작부터 황당해서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저런 소리를 보고 뭐라 그러는주 아나? 바로 '강아지 풀뜯어먹는 소리'라 카는거다. 첫줄부터 삼천포로 빠져부니 끝에는 어데로 가겄노? 하기사 이게 도올의 죄가? 도올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왕필이부터 현대 중국과 대만 일본을 비롯 조선 핫바지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자 할아방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해석이다. 원래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별로 봐줄게 없는 두뇌를 갖고 태어난 도올인지라 뭐 별다른 해석을 할 방법이 없었을거다. 그저 전부 그렇다 항께로 자기도 그렇게 강의를 했을 뿐이겠지. 이게 평범한 학자의 강의라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칭 동양학의 대가요, 노자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뻥을 치는 인간이 이런 것도 바로잡지를 못하면 지 자랑이 얼마나 무색한 것이냐 말이다.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 글자지만 <도덕경> 전체 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할아방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생각 함 해봐바. 사람이 책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 줄 첫 마디다. 노자 할아방도 마찬가지다. 할아방이 <도덕경>이란 위대한 사상서를 쓰면서 그 첫 머리에 저따위 강아지 풀뜯어먹는 소리로 시작했겠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그럼 도를 도가 아니라고 말해야 도가 되는거야? 문장이 성립이 안되부리. 우리 할아방이 작문 배우는 초등학생이 아니자나. 저런 류의 헛소리는 아제가 전공이지 노자 할아방은 절대 저따위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는 사람이 아이다. 명확하고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소리만 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런 엉터리같은 말이 적힌 책은 사상서로 대접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야. 글고, 만약에 저 번역이 맞다고 치면 할아방의 작문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야. 저 말을 한문으로 쓴다면 '도왈도,도비도(道曰道,道非道)'가 되지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가 될 수 없는거야. 할아방은 문장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지 애매하고 모호하게 적는 스타일이 아냐. 그런 점에서 구름하고 많이 닮았지. '가(可)'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래서 '도가도(道可道)'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非常道)'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가 된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할아방이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도(道)'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알아먹고 2천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거다. 이름을 '깨달음'이라 해도 좋고, '섭리'라 해도 좋고, '법칙'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道)'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은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도덕경>의 제1장은 할아방의 무시기에 대해 붙인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을 첫줄부터 못알아먹고 딴 동네 가서들 놀고 자빠졌으니 그 담부터는 볼 것도 없이 죄 횡설수설이 될 수 밖에 없다.

불교가 동양 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 때문이다. 만약 범어로 된 불경을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해서 중국에 소개할 때 도올맹쿠로 엉터리 짓을 했었더라면 불교도 코메디 대본으로 전락했을거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대로 '열반'이라고 음역을 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이란 말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건 이미 열반이 아닌 것이 되버린다. 할아방이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을 써놓은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라고. 뒤에 가보면 알겠지만 이런 문장들의 의미를 모른 채 <도덕경>을 해석한답시고 사까닥질을 치고 있응께 도(道)을 '길'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는 촌극을 벌이게 된다. 도올은 아예 그것을 영역으로 'WAY'라 칸다. 이게 개그가 아니면 뭐가 개그겠노? 도(道)를 조선말로 번역하면 '도'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TAO' 가 된다. 이것을 '길'이라거나 'WAY'로 번역하는 인간은 노자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다. 이런 수준으로 할아방을 팔면서 책장사 강의장사를 하고 않았응께 우찌 구르미한테 욕을 안얻어묵겠노? 계속해서 개그쑈 감상을 해보자.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란 다음 구절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

道)'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

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과나 애플이나 능금

이나 이름은 어떻게 붙이던 그 가르치는 대상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면(이

게 홍야님이 말씀하시는 '공리'다) 좋지 않은가라는 말인 것이다.

도라는 이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을 도라는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

으로 오역을 해버리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도덕경>이란 심오하고

고매한 철학사상서를 도올이 들어서 오역과 악역으로 황칠을 해놓은 탓에 홍야님

말씀처럼 궁민학생 도덕 교과서보다 못한 황당무계한 잡서가 되버린 것이다.

왜 그러냐? 한 줄을 잘 못 읽어버링께로 그 다음 구절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되버리기 때문이다. 앞줄과 뒷줄이 내용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전혀 연결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우찌 고전이라 대접을 받겠노 말이다. <도덕경>이 그

런 책일까? 노자 할아방이 문장 실력이 없어서 앞뒤 연결도 안되는 수작을 그토록

늘어놓았을까? 노자 할아방은 하슈가 아니다. <도덕경> 전체 5천글자는 그야말로

한 글자도 잘못 끼여든 것이 없이 전체가 물 흐르듯한 일관성과 논리성을 갖춘 경

탄할만한 명저이다. 그러나 도올의 번역을 통해 <도덕경>을 읽으면 이건 완죤 유

치원 얼라가 일기 써놓은 책과 같다. 점심 먹은 내용 써고 그 다음에 아침에 늦잠

잔 얘기 나오다가 갑자기 자기 전에 테레비 본거 썼다가 또 오후에 학교에서 있었

던 일을 써논 얼라들 일기장 같다는 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을 그렇게 쓰는 사

람이 우찌 대사상가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책이 어찌 철학서라 말이고? 안 글나?

앞으로 이 연재를 읽어가다 보면 자연히 알겠지만 <도덕경>은 결코 그렇게 허술

한 짜임새를 가진 책이 아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논리정연하고 완벽하게 짜여진 서

술구조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문장의 절약을 보여준다. 그 전체가 가히 천하의

미문이요, 명문이다. 이런 책을 황칠로 망쳐놓는 꼬라지를 보면 정말로 쪼인트를

까주고 싶다. 다음 구절을 보면서 정말로 그런가 확인하자.

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유명만물지모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해 놓은 번역은 이렇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컥! 목이 메인다. 이런 식의 번역문을 보면 결론은 둘 중의 하나다. 노자가 엉터리이거나 도올이 사이비거나.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이름을 붙이고 보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라는 말이다. 바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할아방이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그 무엇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천지의 시작이니 언급할 이유가 없고, 도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는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로 어쩔 수 없이 (도라는)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할아방은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던 안붙이던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놓기 전에는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이 세상의 근본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 편입되는 것은 이름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이다. 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할아방은 이름을 붙이기 전의 무엇은 천지의 시작이니 따지기 어렵고, 도라는 이름을 붙

이고 나야 만물의 모태로서 하나의 인식 대상이 되고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서술을 불과 스물네 글자로 해치워 버린 표현법은 실로 놀라운 바다. 문자 발명 이후에 인류의 기록 중에 여기에 견줄만한 것은 <천부경> 하나 뿐이다. 그리고 이런 까무러칠만한 철학적 사변과 기록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자라는 문자의 위력이다. 그 어떤 문자도 이런 괴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천지지시(天地之始)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지모(萬物之母)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 경계가 바로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인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하며 전세계(前世界)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름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유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할아방은 밝히고 있음이다. 우주의 이전, 태초의 태초, 빅뱅 이전의 세계도 '무극'이라던가 '태극'이라던가 물리학적 용어로 '우주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일단 언어적 표현의 대상물이 되고 언어의 범주에 포함되면 인식과 사유의 대상물이 된다는 철학적 통찰의 압축이다.



 

도올의 번역과 해석을 보라. 저게 무슨 철학이 되며, 사상씩이나 될 소리냐 말이다. 저런 글 홍야님이 300백줄 쓰면 구름은 250줄은 쓴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시작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이기 무슨 소리야? 아무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말장난이자나. 이름이 없는 것이 어떻게 천지의 시작이 돼? 이름이 있는 것은 다 만물의 어미다 소리야? 이런 번역대로 해석되어진다면 <도덕경>은 쓰레기야. 도올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지만 할아방의 세계를 짐작조차 못하는 범부가 <도덕경>을 강의한다고 나선 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는 것이 대한민국 동양학계의 현주소다.



 

다음 구절을 보자.

故常無慾以觀其妙,常有慾以觀其
고상무욕이관기묘,상유욕이관기요




 

역시 <노자와 21세기>의 번역을 먼저 보는게 순서겠지.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는게 도올의 번역이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되는 사람 있나? 욕심이 없으면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리를 보다니? 묘한 것의 반대어가 가장자리던가? 묘함과 가장자리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대구가 되노 말다. 요( )라는 한자가 내가 쓰는 새롬 편집기에서 나타나지를 않는데, 저 '요'자는 '지름길, 샛길 요'자다. '돌 요'로도 쓰인다. 우리가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쓸 때 저 '요' 자를 쓴다. 글자의 어원을 거슬러가면 아주 고대에는 '변방의 요새'를 뜻하기도 했다. 도저히 해석이 안되니까 글자의 어원까지 동원한 끝에 '변방'을 '가장자리'의 뜻으로 끼워넣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 쳐도 읽는 발음도 틀려서 '요'를 '교'라고 읽고 있다.

발음이 틀린건 지엽적인 문제니까 넘어간다쳐도 도올의 해석대로 하면 <도덕경>은 말도 안되는 소리만 나오는 허망한 책이다. 당췌 뜻이 제대로 통하는 구절이 없는거다. 저런 내용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 것도 재주는 참 재주다. 우리 할아방이 도라는 이름에 대해 말을 하다가 왜 뜬금 없이 전혀 엉뚱해 보이는 이런 소리를 이런 위치에서 불쑥 하고 나오냐는 것이다. 도라는 이름과 무명이니 유명이니 하는 소리들과 천지지시나 만물지모가 나온 앞 구절하고 이 구절이 도저히 연결이 안되자나. 이기 무신 철학서고? 그런 생각이 안드나? 도올 번역대로 <도덕경>을 보자면 한심한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과연 <도덕경>이 그런 책일까? 할아방이 전혀 문맥상 상관도 없는 소리를 노망든 할망구 방구끼듯이 아무데나 싸질러 놓은 것일가? 그렇지 않다. 할아방이 엉터리로 써놓은 것이 아니라 도올이 번역을 엉터리로 했기에 그리 보일 뿐이다.



 

이 구절에 쓰인 '욕(慾)'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 보자. 이름(名)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욕(慾)이란 글자가 튀어 나오냐 말이다. 욕(慾)은 '하고 싶어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無慾)은 당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욕(慾)'의 목적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名)이다. 그래서 '고상무욕(故常無慾)'은 '꼭(굳이) (도의)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다. '이관기묘(以觀其妙)' 이 말은 '그 (도의) 묘(妙)를 볼 것이고'로 해석하면 된다. 이어서 역하면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 것이고'가 되겠다. 앞에서 할아방이 뭐라고 했지? 무명이면 천지지시라고 했자나.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보게된다는 말이다. 다음 문장의 뜻은 자연히 이와 같아진다. 상유욕(常有慾), 즉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 요( )를 볼 것이다.' 두 문장을 연결해서 주해를 달아 읽어보자. '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만물지묘)의 요( )를 보게 된다'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妙)와 요( )의 의미가 무엇이냐이다. 무엇일까? 노자는 무엇을 묘라 하고 무엇을 요라 했을까? 그 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가장자리를 본다'는 식의 번역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고전을 그렇게 함부로 지멋대로 해석하면 안되는거다. 특히 전 국민이 다보는 테레비에 나와서 자칭 동양학의 대가라 하면서 이렇게 몰상식한 소리를 하면 안되제.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출이이명




 

암만 머리가 나쁜 도올이라도 이 정도 쉬운 문장이야 안 알겠어? 그런데 여기서 이 시대의 천재 도올은 그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번역하여 가로되, '그런데 두가지는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차말로 번역 지긴다. 기가 막힌다. 다른 노자 주해서를 보면 '이 둘은 같은 근본에서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한다'라고 해놓은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인 노자 주해서의 번역을 가지고 아주 멋을 부려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얼마나 멋지노? 도올은 소설을 써도 잘 쓰겠다. 그러나 양쪽 다 할아방의 본 뜻과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한자는 소리문자가 아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나는대로 옮겨적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조사, 접속사, 관계사 등이 부족하고 띄워쓰기, 어순 등의 문법도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옛날로 거슬러갈 수록 그런 것은 더욱 심하다. 할아방이 살았던 시대는 후주 시대로 소위 말하는 춘추시대로 공자와 동시대이다. 영어가 오늘날의 영어일 수 있는 것은 '세익스피어' 때문인 것처럼 한자가 오늘의 한자일 수 있는 데는 공자의 공이 지극히 크다. 공자가 사용한 문장의 구사법을 '춘추필법'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한자를 가지고 문장을 기록하는 방법론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의의를 가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공자 이전에는 한자의 기록법이 중구난방이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할아방의 <도덕경>을 볼 때에 그 해석에 고심하게 되는 것도 한자 기록의 규칙, 즉 문법이 확립되고 통일되기 전의 기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 이전의 저작물들은 글을 쓴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필법을 가지고 썼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던 시대의 기록인 <도덕경>을 읽으려고 하면 우리는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한자 실력만 믿고 또는 옥편 한권 들고 앉아서 해석해보겠다고 덤비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더우기 수행의 바탕이 없이 학문적인 논리만으로 덤비면 그 결과가 도올의 명강 'EBS 동양 고전' 꼴이 되고 만다. 원문의 내용이 문자로서와 동시에 심안으로서 읽혀져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가지 측면은 인쇄술이 없어서 일일이 필사해서 책을 만들었던 고대에는 책을 아예 외워버리는 암송이 공부하는 방법이었고, 일부의 경전은 쉬운 암송을 위하여 소리나는 대로 읽을 때의 리듬과 가락을 염두에 두고 적은 글들이 많다는 것이다. <불경>도 암송시에 리듬과 가락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는 일종의 산문시이다. <도덕경>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도교는 중이 독경을 하듯이 <도덕경>을 가지고 노래를 부른다. <도덕경>의 독경을 들어보면 불경 못지않게 구성지고 듣기좋은 가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춘향전'이나 '심청전'같은 옛 소설들도 마찬가지로 가락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판소리로 부를 때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기고 가락이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음악적 효과를 위해서 문장의 이해에 도움이 될 조사류를 생략하거나 어순을 바꾸는 일은 흔히 있는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문장을 구속하기도 한다. 문장으로서의 한문은 띄워쓰기가 없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움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 여덜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면 전후 네글자로 둘로 갈라지지 세글자, 다섯글자, 혹은 여섯글자 두 글자 식으로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앞의 네글자가 '◎◎ ◎◎'이면, 뒤의 네글자도 '◎◎ ◎◎'가 되고 앞부분이 '◎◎◎ ◎'이면 뒤도 '◎◎◎ ◎'이 되도록 문장을 틀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 할아방은 결벽증이 있는지 자기 글 속에 고유한 글버릇으로서 이런 규칙성을 대단히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이런 점은 우리가 할아방의 글 의도를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此兩者同,出而異名(차양자동,출이이명)'이란 문장을 해석할 때 우선 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차양자동(此兩者同'이란 앞 부분을 띄워쓰면 '차양자 동'이 된다. 즉 '이 두가지(차양자)는 같다(동)'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부분도 같은 구조로 띄워 읽으면 정확한 할아방의 의도가 나온다. '출이이 명'이 되는 것이다. 즉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출이이) 이름(명)이다'라는 문장이다. 이것을 '출이 이명'으로 읽으면 '다른 이름(이명)으로 나온 것(출이)이다'라는 의미가 다른 글이 되어 버린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름이다'와 '다른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사뭇 다른 것이다. 후자를 택하게 되면 앞에 나온 내용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할아방이 이야기 해왔던 것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이고 안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었다. 무명(無名)이냐 유명(有名)이냐 즉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말해온 것이지, 이름이 같으냐 다르냐를 말해온 것이 아니다. 천지지시와 만물지모의 차이는 이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묘와 요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부를 때와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을 때의 차이이다. 따라서 저 문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정확한 것이 된다. '저 두가지는 같은 것인데, 차이가 나는 것은 이름이다(있느냐 없느냐)'

보고 있듯이 할아방의 글은 건너 뛰거나 난데없이 엉뚱한 글이 하나씩 끼여들거나 논리가 엉뚱한 곳으로 튀거나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서 물처럼 끊기지 않고 흐르는 사상의 강이다. 이것을 번역을 제대로 안항께로 그냥 중구난방 좌충우돌하는 글이 되버리는 것이다. 사실 나는 도올이 '고전 강의'를 하면서 노자 할아방을 제대로 설명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걍 난장판이 되더라 말이지. 하느니 지 자랑이요, 나오느니 억지고 내미느니 무식이라 도저히 참고 봐주기가 어려웠다. 이제부터 보면 알겠지만 첨부터 끝까지 맞는게 하나도 없고, 제대로 아는게 전무한기야. 입만 열면 자랑해쌓는 그노무 고려대 말이다, 지가 그게 다닐 때부텀 '노자'를 읽고 뿅 가서 평생을 심취했다카는데 그렇게 엉터리로 읽고 뿅갈게 뭐 있노 말다. 지가 번역해 놓은 노자는 뿅갈게 하나도 없는 엉터리 작문인데. 나는 중학교 때 <도덕경>을 처음 읽었어도 저렇게 황당무계하게 읽지는 않았다.



 

다음 구절을 보자.

同謂之玄,玄之又玄
동위지현,현지우현




 

갈수록 한자가 쪼께 어려번지제. 이렇게 어려븐 한자가 나옹께로 도올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런 어려븐 한자들이 앞으로 계속 나올낀데 도올이 그 한심한 한자 실력을 갖고 우찌 해석을 하고 강의를 하노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동양학의 대가 도올을 굳게 믿자. 우찌 해놨는지 같이 보면 될거 아이가. 도올이 이 구절을 풀이하여 가라사대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라 해 놨다. 역시 도올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문호다. 표현 함 봐바. 철학서의 번역이 아니라 완죤 시다. 근데 문제는 일단 도올이 번역만 했다하면 우리는 알아먹을 수가 없는 소리가 되분다는 거다. 그런 것을 가물타고 하다니? 도대체 뭐가 가물타는 것이고 가문기 뭐꼬? 도올이 하는 소리를 주욱 이어서 함보까?

'욕심이 없으면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리를 보는데,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고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으니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 하니 가물코 또 가물토다.'

이기 뭔 소린주 다 알제?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아이가. 철학이라는기, 사상이라능기 무식한 민초들 골탕멕이는 소리가 아이다. 누가 듣고 누가 보더라도 타당성과 합리성과 논리성과 유용성을 가진 이바구를 철학이라 하고 사상이라 한다. 도올이 번역해 놓은 것이 맞다고 치면 노자철학이 철학이 될 수 있겠나? 저런 말장난 잘하는 인간이 여게 두엇 있제. 아제하고 하슈가 저런 소리는 전공이다. 도올이하고 셋이 놀면 딱 어울리끼야. 그런데 구름은 도저히 같이 놀아줄 수가 없다. 눈높이에도 한계가 있는거자나.



 

'현(玄)'은 '검을 현'이다. 그러나 검은 색을 가르키는 '흑(黑)' 자와는 쓰임이 다르다. 천자문의 첫 글자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란 말처럼 하늘의 색이고, 신비스러운 궁창의 색이다. 이것을 '가물한 색깔'이라고 표현해서 안될 것은 없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을 직역하면 '검은 것으로서 같다'는 뜻이다. 바꾸어 표현하면 '검기는 마찬가지다'가 된다.

뭐가? 바로 이름을 붙이기 전의 그 무엇(도)이나 (도라고)이름 붙인 그 무엇은 사람이 뭐라고 나발을 불던지간에 검기는 마찬가지니 똑같은 것이라고 할아방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고 해 놓으니 이거 참 골때리는 소리가 되분다. 뒷부분의 '현지우현(玄之又玄)'은 더욱 기가 막힌다. 이 구절을 '가물고 또 가물타'라고 해서 어쩌자는 것이야? 그래 가지고 앞뒤가 연결이 되기나 하냐 말이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은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라는 말이자나. 암만 한자를 제대로 몰라도 그렇지 이 정도 난이도의 한자를 갖고 번역조차 똑바로 못하면 우찌 동양학을 하며, 우찌 노자를 갖고 썰을 푼다 말이고? 대책이 없어분다. 21세기가 걱정시럽다.



 

앞의 현(玄)은 묘(妙)의 성질이고 뒤의 우현(又玄)은 요( )의 성질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묘를 보거나, 굳이 이름을 붙여서 요를 보거나 간에 이 두 가지가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 같이 검어서 양자는 결국 같다'는 설명인 것이다. 여기서 할아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지금 '도(道)'라고 이름을 붙여서 뭔가를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이름을 편의상 '도'라고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에 신경쓰지 말자는 소리다. 그 이름이 도이건 다른 무엇이건 굳이 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던 이름 없이 보건 그것이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리 봐도 검고 저리 봐도 검은 놈이니 검은 것만 보면 되지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노자가 하고 싶은 말, 즉 결론이 나온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던 안 붙이던 묘를 보건 요를 보건 자기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이런 말이다. 제1장의 중심어는 명(名)이고, 결론은 '도이중묘지문(道以衆妙之門)'이다.



 

'도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긍께 그쯤만 알고 다음 썰을 들어보란 말이여'하고 할아방은 <도덕경>의 서두를 꺼내고 있음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도(道)'라는 이름에 사로잡힐까봐 노파심으로 서두에 못을 박아두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해놓은 마지막 구절은 번역은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겠는가!'이다. 제1장에서 그래도 비슷하게 겐또친건 이 마지막 한 줄이다. 도올의 개그쑈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2장 3장으로 넘어가면 갈 수록 골때리는 개그가 나온다. 웃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봐야 될거다. 계속 봐 주자.



 

제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1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도덕경>의 원문과 도올의 번역문과 구름의 번역문을 차례로 보면 무엇인가 느끼는게 있을거다.



 

<도덕경 제1장>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故常無慾以觀其妙,常有慾以觀其,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무명천지지시,유명만물지모,고상무욕이관기묘,상유욕이관기요,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차양자동,출이이명,동위지현,현지우현,중묘지문


 

◆ 도올 역 ◆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라고 한다.

가물코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소감이 어떻노? 저게 천하의 대 사상서라는 <도덕경>의 서문이란다. 당췌 무신 소리를 하는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제? 우찌된 글이 그래, 불과 13줄 밖에 안되는데 서로 연결되는 소리가 안 보이노 말이다. 열세줄이 전부 딴 소리다. 글이라는 것이 앞줄의 내용을 받아 뒷줄로 이어져야지 줄마다 딴 소리를 하는 글이 어딨더노? 이래 놓고 이걸 가치로운 고전이라꼬 21세기 사람들한테 내민다 말이야?

만약 이게 정말 <도덕경>이라면 구름이 '벽운'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겠나? 내가 뭐 할 짓이 없어서 도를 배우고자 하겠노? 나는 공자가 말했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면 버리는 사람이다.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이 기록했다는 바이블이라도 개떡 같은 소리는 안 돌아보는 사람이다. 내가 부처님한테 귀의하고 노자 할아방을 좋아하는 이유인즉슨 그 하시는 말씀이 전부 도리에 맞고 이치가 합당하고 앞뒤가 딱딱 어울리는 고매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방 말씀을 저렇게 조잡한 맹탕으로 둔갑을 시켜갖고 사람들한테 팔아묵는 꼴을 두고봐야 되겠나 이말이다. 제대로 된 구름의 번역을 보고 다음 장으로 가보자. 진짜르 골때리는 쑈가 벌어지고 있었응께.



 

♡ 구름 역 ♡

 

도(는 그 이름을 )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출처 : 책으로 세상을 여는 사람들
글쓴이 : 황금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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