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승희 사건과 북창동 승연 사건은 약 한달여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일들이다. 승희 사건이야 워낙 뉴스로 많이 거론되다 보니까 나름대로 분석이 되어 알려 졌지만 승연사건은 몇몇 의혹만 나돌며 기다 아니다 공방의 모양새로 접어들고 있다. 길거리 똘마니들이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 총수 둘째 아드님을 무엄하고 건방지게 두들겨 팼다 이거다. 누구나 자기자식이 나가서 맞고 왔다면 불쾌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마는 이건 단순히 화가 나는 문제로 국한되는 게 아니다. 거대 조직의 수장이 완전히 가오 구긴 꼴이 된 것이다. 먼저 딸려둔 운전수 등을 혼내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경호원으로 일하는 얘들 중에는 왕년에 그 동네 똘마니 한둘쯤은 후배로 데리고 다닌 자도 있을 것이고 그쪽이나 저쪽이나 세계가 비슷한 처지라 이래저래 선이 닿는 관계였을 터인데 자세히 알아보니 누구누구의 한참 아래에 있던 꼬마둥이가 회장님의 둘째 아드님의 눈깔님을 건드렸다고 하니 이건 아무리 추려 봐도 계통적으로 정리가 안 되는 상황발생이 되고 만 것이다. 거대 조직의 수장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명성을 흠모하고 우러르고 있으며 그 힘이 바탕이 되어 조직이 유지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승연은 자기 아들이 얻어맞고 들어와서 속상한 부모마음에 앞서 거대 조직의 수장인 자신이 길거리 똘마니들에게 망신이나 당하는 존재라는 것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특히 아랫것들한테 면이 안서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상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환장한다. 이때 한 측근이 “ 회장님 제가 이놈들을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 하고 나서자 그나마 자신의 체면과 역할을 되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한 승연은 “아니다 내가 자초지종을 알아보마” 하고 출동을 했을것... 관계자들을 다 잡아놓고 기를 완전히 꺾어 놔야 가오가 산다. 산에 끌고 가 생매장 시킬 듯이 겁도 주고 계통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차곡차곡 굴복을 시키는 것이 수순이다. 말이 경호원이지 동네 똘마니보다는 몇 단계 직급이 높은 어깨들인데 몇 대 주어패고 으름장을 놓으니 이넘들 손발이 반들거리게 싹싹 빌지 않을 수가 없다. “회장님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회장님의 충복이 되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승연은 더 근엄해 져야 한다. “알고 보니 누구누구 고향 후배라던데 자네가 그러면 쓰겠는가? 내가 자네를 미워해서 그런게 아니니 이해하게” 하면서 치료비라도 하라고 술집 쥔에게 던져주는 몇 천 만원 돈다발.. 거래가 그럴듯하게 성사된 것이다.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무개를 통해서 나를 찾아오게 ” 하며 나가는 회장님 뒷모습에 똘마니들은 오줌이 질금질금 나올 판이다. 승연은 자존심을 지켰고 또한 결과적으로 자기 아들을 때린 넘들 까지 포용 하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며 조직 계통을 잘 정리정돈 한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똘마니들도 계기야 어찌됐건 거대그룹 회장님과 연을 이었으니 식구들 먹여 살리는데 큰 힘을 얻은 것이고 돈다발도 두둑히 받았으니 섭섭할 일도 없고 또 이 사실이 소문나면 그 양반 쪽 팔릴 일이니 계속 덮어두고 자신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밤탱이된 눈탱이로 눈물 지으며 무척 뿌듯해 했을 것이다. 거래는 그렇게 완벽하게 성사 되었다. 승연 사건이 승희 사건보다 5주 가량 먼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그보다 1주일 늦게 된 것은 그 거래의 완벽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거래는 항상 관계자외 출입금지가 되어야 하는데 초장에 너무 기선을 제압하다가 주변 목격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었고 그 비관계자들의 입소문 때문에 그 일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 알려진 이상 똘마니들은 총수고 뭐고 관계는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철저히 피해자가 되어서 가해자인 승연과 형사 합의라는 쇼부를 치는것이 남는 장사가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랫동안 개를 많이 길러 봐서 그들의 습성을 거의 파악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승연 사건 정도는 안 봐도 풀HD 칼라 비디오다. 승연은 세상을 개 세상 정도로 보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아니 그는 참으로 훌륭하게 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승희 사건은 충격이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다. 세상이 보다 아름다워지기를 원하고 사람값이 보다 높이 매겨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저 부단히 가슴 아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블랙홀이었다. 주변의 모든 상황, 인식, 그리고 가장 가벼운 질량의 소통 까지도 몽땅 빨아들인 검은 블랙홀 이었다. 그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이처럼 폐쇄적이고 분노에 대한 흡인력이 강했다. 누구를 탓하기 앞서 그가 처한 존재와 주변 구조의 모순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서 블랙홀이 생성된 것이다. 존재와 구조라는 추상적인 단어밖에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말은 없다. 그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참...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맛이 쓰다.... 아 그것 참...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던 블랙홀이 어느 순간 극한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매우 짧은 시간에 변화가 일어난다. 화이트홀이다. 그는 그동안 빨아들인 모든 질량을 한꺼번에 에너지화 해서 순식간에 방출해 버리는 화이트홀이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버지니아 공대 교정에 170 여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승희 사건은 승연의 둘째 아들이 길거리에서 눈탱이 맞고 들어온 사건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크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생때같은 젊은 자녀들을 무려 30여명이나 잃었으니 이 역사상 초유의 사건에 미국은 그저 얼이 빠져버린 것이다. NBC의 승희 동영상은 결과적으로 방송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물론 감춰둔다고 장땡은 아니겠지만 이로 인하여 미국이란 거대 조직은 하나의 거래를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승희가 던진 육성 메시지에 미국이라는 거대 조직이 갖는 모순을 들춰낸 것이 되었다. 거대한 아메리카는 어떻게든 승희가 던진 화두에 답을 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무시하기에는 사건이 너무 크고 답하기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는 형국이라 난감하기 그지 없다. 어찌보면 승연이 사는 세계 즉 개세상이 부러울 수도 있는 것이 지금 미국의 입장이다. 대화건 거래건 소통이건 결국 주고받음을 의미한다. 승연 사건은 나름대로 주고받는 거래가 정확히 성립 되었지만 승희 사건은 그렇지 못했다. 주고받지 못하면 경색되고 경색은 불길하며 좋지 않은 것이 된다. 그래서 입맛이 쓰다... 승연 사건과 승희 사건은 먼 거리에서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지만 답은 한 가지 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찌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결국 그 제목이다. 간단하게 개 세상을 살고 싶은 사람은 그리 살면 행복할 것이지만 아픔을 부여잡고 희망을 놓지 않고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생각한다면 걱정거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승희가 던진 화두에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대한 조직인 미국이 어떤 대답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항상 두려움이라는 것이 사건을 촉발 시킨다는 것이다. 승희의 두려움은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생성시켰고 승연의 두려움은 개 세계를 완성시켰는데 거대조직 미국의 두려움은 무엇을 낳게 될 것인가? 피지배자의 두려움은 비굴함을 나타내고 지배자의 두려움은 비극을 나타낼 공산이 크다. 승연의 경우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비극을 미화하면 개 세상이 창출 되겠지만 참된 인간이라면 비극도 싫고 미화는 더 싫으며 무엇보다 두려움이 가장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두려움을 풀어내는 끈기와 애정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천명이어서 인간이라는 단어 속에는 관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게 아닌지 싶다. 인간이란 말은 존재적 의미 보다는 관계적 의미가 강한데 영어의 퍼즌이 개별적 존재의 사람이란 뜻이 강한데 반해 매우 상대적임을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인간 세상이라는 것이 정치, 사회, 언론들 모두 모순과 비극을 미화시키며 개 세계 창달에 앞장서는 부류들이 있는 반면 아픔을 끌어안으며 더디더라도 보다 나은 인간세계를 꿈꾸는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다. 결국 두려움이라고 하는 마약을 계속 주입하여 중독 시키느냐 아니면 그것을 확연하게 걷어내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물리적으로 해석되기 어려운 면조차 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누가 무슨 역할을 자임하고 또 누구는 어떤 선언을 계속 해대지만 세상에서 두려움이란 것은 아직 요지부동이다. 쉬운 예로 지역감정 하나만 보더라도 두려움을 가장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정치한다는 인간이나 지식인이라고 자임하는 자들부터 먼저 두려움을 두려워한대서야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절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항상 일거리가 남아있는 이의 몫으로 존재한다는 아름다운 사실이 이 세상에 버젓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얼마나 멋진 진리란 말인가. 내일 일을 생각하며 희망을 지닐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 제대로 살고 있는 참 좋은 인간이다. ‘잘 살아 보세’ 라는 노래가 왜 독재자의 전유물로 활용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구윤상님의 글을 스크랩 해 온것입니다..((디지털 김제시대))